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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30일의 도보행진을 마치고

“몸은 괜찮아요?” “도착하는 날 심사 연장 소식 듣고 심정이 어땠어요?” 30일의 도보행진을 마치고 나서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답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30일 동안 걷기운동을 해서인지 몸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걱정 마시라고 하는 말이지만 거짓말만은 아닙니다. 밥도 평소보다 잘 챙겨먹고 아침 저녁으로 준비운동 정리운동 낮에는 걷기운동, 이보다 더 건강할 수는 없다!

건강해지는 시간

몸보다 마음이 튼튼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행진 초반과 20일쯤 넘어가는 즈음에 몸이 많이 힘들기도 했는데요, 하루하루 찾아와 같이 걷는 분들 덕분에 기운 내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매일매일 너무나 다양한 분들이 찾아오셨어요. 정체성과 직업과 나이도 다양했지만, 싸워본 사람들은 싸우는 그 맘 안다며 찾아왔고, 싸워볼 기회조차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은 함께 하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 이런 만남이 가능했던 것이 ‘차별금지법’이라는 의제가 가진 고유한 힘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평등을 이룰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법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미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선언을 담고 있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평등하다는 감각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기가 더 쉽지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이라고 하면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과 같은 집단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우리가 노동자나 재난참사 유가족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수자는 소수일지 모르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소수자가 되는 사람들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싸움으로든 평등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차별당한 사람만 혼자 서러운 사회에 누군가를 남겨두지 않겠구나… 우리는 늘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외로움이 외롭지 않게

그래도 외로움이 불쑥 찾아드는 때가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모두를 위한 법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법일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입법 시도 초기부터 반대 집단이 ‘성소수자를 위한 법’으로 알리고 정치인들도 반대 집단의 눈치만 보다 보니 시민사회에서도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쉬웠던 적도 많습니다.

이번 도보행진을 하면서 대추리에 다녀온 날이 있었어요.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을 하면서 다니던 게 2006년이니 벌써 15년입니다. 주민들이 이주한 마을에 몇 번 다녀오지 못했는데도 신종원 이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어느 정권이나 농민을 위한 정부는 한 번도 없어봤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헤어질 시간이 됐습니다. “이렇게 보내면 서운해서 어떡하냐.” 제가 오히려 평소에 찾아뵙지도 못하고 죄송하다고 하니 이장님이 말을 끊으며 얘기하십니다. “나는 그런 소리가 제일 듣기 싫어. 이렇게 그냥 오면 되는 거야. 다들 바쁘잖아. 나는 죽는 날까지 대추리가 지구상에서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게 사명인 사람이야. 그게 내 몫이야.”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외롭게 제 몫의 싸움을 하는 이들일수록 누구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지켜야 할 자리가 있어 다른 싸움의 자리에 찾아가기는 더 어렵습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을 혼자 남겨두지 않기 위해 늘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싸움에서 이겼을 때 그것을 모두의 승리로 만드는 일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싸움도 그렇겠더라고요. 여러 싸움의 자리에 찾아가지 못하는 미안함도, 힘겨운 싸움의 자리에 찾아오는 이 드물 때의 서운함도, 늘 같이 있어야 함께 싸우는 건 아니라는 걸 떠올리며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이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착하는 날 심사 연장 소식 듣고 심정이 어땠어요?” 두번째 질문은 답하기 쉽지 않았어요. 30일의 걸음 끝에 들은 답이라 그런지 절망과 분노도 컸고, 2024년까지 연장한다는 결정이 어이없고 우습기도 했고, 하지만 국회의 영혼없는 반응이 30일의 시간을 허무하게 할 만큼 결정적인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거든요.

2021년의 국회 정기회 폐회를 앞둔 지금도 비슷합니다. 국회는 차별금지법에 관한 논의를 한끗도 진전시키지 않았지만 국회 밖 평등의 기운은 나날이 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한달이 되어가는 국회 앞 농성장은 매일같이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이야기로 웃음이 쌓여갑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며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쌓이는 평등의 감각, 그 이전으로는 누구도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차별할 자유 위해 차별금지법 어렵다는 국민의힘과 차별금지법 어려워하며 차별할 자유 주는 더불어민주당 데리고 차별금지법 만들려니 조금 피곤하다는 정도?

걷는 동안 걱정해주신 많은 분들께 이렇게 감사 인사와 더불어 안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