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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집회는 범인이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다시 외치는 집회시위의 권리

집회와 시위가 곤경에 빠졌다.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 보였던 코로나19가 광복절 집회 이후 빠르게 퍼지자, 정부 당국과 언론은 일제히 집회를 금지해야 한다고 외쳤다. 집회시위의 권리를 말해온 인권단체들도 덩달아 곤경에 빠졌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유롭게 집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권의 원칙은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한 곳에 모이지도, 맨 얼굴을 마주보지도 말라는 감염병의 시대, 여러 명이 한 곳에 모여 외치는 집회시위는 이제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코로나19와 집회시위

코로나19 확산 이후 서로 모이지 말고 거리를 두라는 수칙이 금과옥조처럼 등장하며 당연하다는 듯 집회 역시 금지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농성장은 철거되었고, 마치 집회가 공식적으로 ‘허가제’라도 된 듯 집회신고에 대한 불허가 연달아 이어졌다. 이토록 엄중한 시국에 여러 명이 한 곳에 모이는 집회는 그 자체로 구시대적이자 위험한 것처럼 이야기되었다.

그 와중에 진행된 극우 세력의 집회는 집회 금지 흐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광복절 집회 이후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집회시위 자체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같은 시기 국회는 집회 금지 사유로 ‘감염병 위협’을 명문화는 내용의 집시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집회시위를 대하는 경찰의 방식 역시 더욱 엄격해졌다.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개천절 광화문에 차벽이 다시 등장했으며, 최근 경찰은 ‘효율적인 집회 관리’를 위해서 차벽을 대체할 수 있는 이동식 강철 펜스를 새롭게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집회와 시위가 방역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든지 모여서 집회를 통해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공권력은 이를 허가하거나 불허할 권한을 가지는 게 아니라 북돋을 의무가 있다. 헌법에도 명시된 집회시위의 자유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이는 데 위험요소가 있다면 그를 이유로 집회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집회가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권력이 보장하는 권리였어야 할 집회는 어쩌다 이렇게 금지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렸을까.

 

집회는 범인이 아니다

코로나19로부터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혹은 바이러스가 확산되었을 때 일어날 경제적 파급을 이유로, 집회 금지 조치는 당연하거나 꼭 필요한 것처럼 용인되었다. ‘다수 사회 구성원의 안전’을 위해 집회를 금지한다는 명목은 이제 더 나아가 ‘집회 참여자의 안전’을 위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광복절 집회 참여자들이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은 집회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사랑제일교회와 같이 몰상식한 극우 세력, 혹은 민주노총과 같은 강성 시위꾼 때문에 집회를 안전하게 진행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애초 광복절 집회보다 훨씬 이전인 코로나 확산 초기부터도 지자체와 경찰의 대응 방식은 전면적 집회 금지 일변도였다. 서울시와 경기도를 필두로 한 집회금지장소 고시는 2월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경찰은 감염병예방법 49조를 근거로 연달아 집회금지 통보를 내렸다. 이후 법원 판결로 집회가 재개되었지만, 코로나 재확산을 이유로 더욱 강력한 집회금지 조처가 이어지고 있다.

집회 금지 흐름은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만의 일이 아니다. 이전부터 언제나 집회는 공공안전과 사회 질서를 해치는 ‘불온한 것’으로 치부되어왔기 때문이다. 불법 폭력 시위를 엄단하겠다는 정부 정책은 집권세력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반복해서 등장했다. 정부와 경찰은 기본적으로 집회를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봐왔고, 이러한 시각은 코로나19라는 상황을 만나며 전면적 집회 금지로 드러났다. 공권력은 한 번도 안전한 집회를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본 적조차 없다. 그저 집회 개최를 원천적으로 금지했을 뿐이다. 마치 방역과 안전을 해치는 주범처럼 지목당하고 있지만, 집회는 범인이 아니다.

 

집회와 시위는 어떤 권리인가

집회시위의 권리는 흔히 개인이 집회에 참여할 자유 정도로 이해되곤 한다. 그렇기에 현재 집회를 둘러싼 상황은 ‘개인이 감염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집회에 참여할 자유’와 ‘전체 사회 안전’ 사이의 대립으로만 이야기된다. 개인이 집회에 참여하는 행위는 곧 사회 전체의 안전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극우 세력이 진행한 집회에서 주최 측과 참여자들이 위험한 행동을 보였을 때 집회에 대한 반감은 절정을 찍었다. 집회는 곧 안전 수칙을 무시하는 이기적 행동이라는 정서가 생겨났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위해 노력하며 진행된 집회들도 동시에 있었다. 정부와 경찰이 명확한 기준도 제시하지 않은 채 전면적 집회 금지 일색으로 나설 때, 부당한 노동 환경에서의 억울함을 알리는 노동자들이나 사회적 재난에 맞서 함께 살아가자고 외치는 장애인들은, 마스크를 쓰고 서로 거리를 벌리며 심지어 방진복을 입고 집회를 진행했다. 집회의 핵심은 모이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모여서 외치는 내용에 있다. 바이러스는 평등할지언정 바이러스로 인한 여파는 평등하지 않기에, 2020년 현재 모든 사람이 마주한 재난 앞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이 더욱 크게 고통 받고 있다. 집회는 그간 사회가 귀 기울이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통로가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는 더 나아질 수 있다. 집회는 억압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써 그 의미를 지닌다. 코로나 시대에 집회시위의 권리가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광복절 극우 집회 당시 이들이 마스크를 벗고 경찰에게 침을 뱉으며 이후 검사와 역학조사를 거부한 것은 집회라는 민주적 공론장을, 나아가 집회의 권리를 지키기보다는 파괴하는 행위였다. 같은 날 민주노총이 진행한 노동자들의 집회가 참여자들에게 방역 수칙을 강조했으며, 이후 감염 여부 조사에도 성실히 임했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극우 세력의 집회는 단지 집회라는 이유로 비판받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의 존재를 부정하며 참여자와 주변인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극우 세력의 집회가 곧 집회 전체를 금지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다.

 

다시, 자유롭게 집회하기 위해서는

지난 4월 유엔 평화적 집회결사 특별보고관은 ‘코로나 시기의 집회·결사의 자유에 관한 10대 원칙’을 발표하며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권리 침해의 구실로 사용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을 겪는 사회, 목 놓아 외치지 않으면 전혀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여전히 모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들에게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해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집회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말할 수 있도록, 이들의 말이 잘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의무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집회할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더 많은 집회가 안전하게 열릴 수 있어야 한다. 방역과 집회는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집회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과정임을, 모여서 외쳐온 사람들의 힘으로 사회가 더 나아져왔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