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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잔인한 4월의 단상

현란한 봄햇살에 눈이 아린다. 봄비 뒤의 햇살이라 생명을 움튼 대지는 촉촉하고 싱그럽다. 얼룩덜룩 칙칙한 시멘트벽들과 치렁치렁 전봇대 전선들로 가득한 골목도 새하얗게 핀 목련나무 몇 그루 덕에 그럴 듯한 봄사진 배경이 된다.
생동과 역동의 화창한 봄날이다.

허나 여전히 세상은 무섭고 잔인하고 어지럽다.
실종된 10살 남짓의 아이들이 세 달만에 처참한 주검이 되어 돌아오고, 일산에선 한 초등학생을 납치하려했던 미수사건도 발생했다.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불안하다. 오르는 물가와 각박한 살림살이 때문에 마음은 한없이 무거운데 이젠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조차 엄두가 나질 않는다.
불안감과 공포, 범인에 대한 분노는 법무부가 10월부터 시행하겠다는 일부 성폭행 전과자에 대한 전자발찌 착용을 정당화하는 감정기제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전자발찌 착용이 불러올 감시국가를 우려하는 인권단체는 피해자들의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나 몰라라 하면서 가해자 인권 운운하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된다.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거의 저주 수준이다.

어렵고 답답하다.
대립의 격렬한 구도는 '피해자' 대 '가해자'이고 그 외의 어떤 입장도 그 구도 안으로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가해자의 처벌과 감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겐 다른 어떤 입장도 모두가 '가해자'의 편에서 이야기 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운동사회도 이런 논리구도에 익숙하다. 종북주의를 비판하면 반김, 반핵을 주장하는 수구우익과 동일하다는 논리와 닮아있지 않은가) 심지어 '가해자의 딸을 강간하자'라는 말까지 심심찮게 나온다. 무섭고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런 파시즘이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국가통제와 감시의 확장이 갖는 반인권적 맥락이 얼마나 큰 울림이 되어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며,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넓은 아량'과 '너그러운 처벌'을 가능하게 했던 남성의 정치와 역사를 성찰해야 한다는 주장은 또 얼마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것인가. 이 격렬함이 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하는 소심한 생각이 입을 막는다.

그런데..
다양한 논쟁이 불가능한 파시즘적인 분위기와는 별개로, '전자발찌 착용'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직 명확한 입장이 서지 않는 건 나의 인권지수가 낮아서일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자는 게 아니다. '인간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설정된 초월적 존재'라는 설정에서 인권의 탄생이 비롯되었기에 중요한 인권의 목록이 될 수 있었던 신체의 자유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사회에서 공공의 안전을 위해 제약이 가능한 자유권이 되었다. 그래서 '구금시설 수형자의 인권'은 강조되지만,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하지 않은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로서의 구금' 자체를 반인권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처벌의 개념에 일부 흉악한 범죄자들에 대한 일상적 감시가 포함될 순 없을까. 누범자에 대한 감시를 통해 행동의 제약을 가져온다면 이를 '신체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중처벌에 대한 개념도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법률 역사적 맥락에서 변화가능하진 않을까. 특정 대상에 대한 감시가 불필요한 감시와 통제를 불러오는 건 필연적인 과정일까. 그런 불필요한 감시와 통제의 확장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그런 특정한 감시를 막는 것 외에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인권운동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얘기하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일 터인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떠오르다 보니 나의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 지수가 아직도 낮은 것 같아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