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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평소 날이 가물어 비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정부종합청사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에 관한 법률인 ‘대한민국 국기법’(아래 국기법) 시행령을 제정하려는 정부에 항의하는 1인 시위를 할 때 비가 내리자, ‘하필이면’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어떤 사건이 자기문제로 맞닥뜨릴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태도가 달라지는 ‘나약한’ 또는 ‘간사한’ 존재인가 봅니다. 결국 저는 장마 시작을 알리는 비를 살짝 맞으며 1인 시위를 해야 했습니다.

1인 시위는 처음에는 사실 집시법이 막아놓은 ‘집회?표현의 자유’를 옆으로 비껴서라도 실현하기 위한 행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둘이상이 모이면 집회가 성립하는 법의 허점을 뚫고 집회신고를 하지 않으면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우리나라의 집시법은 신고제라고 하지만 허가제나 다름없는 현실이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1인 시위를 합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1인 시위를 하러 함께 간 영원은 재밌는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한다며 웃어보라고 했는데 웃는 것 이상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처음에 내 표정은 굳어 있었어요. 시위를 하며 웃으면 진정성, 진지함이 훼손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학생 때부터 집회는 ‘진지하게, 결연하게’라는 생각이 제 머리에 들어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의 얘기를 듣고 나니 ‘꼭 엄숙한 표정만 지어야만 진정성이 전달될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타인이 나의 생각에 공명하는 과정은 ‘사안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만, ‘나의 입장에 대한 자신감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흥미를 가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굳은 표정은 타인이 ‘말 걸기’ 어렵지만, 즐거운 표정과 미소는 타인과 나의 거리감을 좁혀주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물론 시위자의 태도는 사안마다 다를 거라고 봅니다. 생존이 위협받는 사안을 걸고 시위를 하면서 웃으며 시위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오늘처럼 국기법에 대한 항의와 거부는 웃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게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의 어떤 얼굴 표정을 원할까?’, ‘1인 시위를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소통은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다양한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표정을 원했는지 생각해보시고 의견을 주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국기법 항의 1인 시위를 비롯한 수많은 시위들이 우리 앞에 남았으니까요.)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 시위 속에서
비가 오는 날인데도 우리를 제외한 1인 시위자들이 4팀이나 더 있었습니다. 공무원노조에서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강원도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한 여성노동자의 시위, 성신여대의 사학재단 비리를 고발하며 감사실시를 촉구하는 교수의 시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의 반인권적 결정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 등이 더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전쟁 때 납북된 사람들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을 실시하라는 기자회견도 있었고요.
정말 우리 사회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는 정부기관이나 기업 앞에 가면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더구나 시위가 벌어지는 공간은 여기만이 아닐 테니까요. 시청 앞, 국회 앞, 산업인력공단 앞, 노동부 앞 ,교육부 앞, 복지부 앞 등등 .
한국에 산재한 문제를 우리가 ‘모두’ 해결할 수는 없지만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를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며 ‘연대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 정말 ‘소통의 시작’일 것입니다. 물론 나의 현실적인 모습이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며 1인 시위를 계속 하는 남은 분들에게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밖에 할 수 없더라도 ‘소통’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