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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날개가 있다면

요즘은 황당한 일을 자주 겪습니다. 지난해 12월 22일 영등포역에서 열린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Homeless Memorial Day)에 갔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2001년부터 밤이 제일 긴 동짓날에 해마다 열리는 이 행사는 1년 평균 400여명씩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들을 추모하고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요구하는 장입니다. 참가자들은 추모제에 앞서 역사 광장에서 결의대회를 연 후 국회 앞으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행진 참가자들은 100명이 안되고 한 차선을 차지해 길이로는 50미터도 안 되는 어찌 보면 초라한 행진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곧 이들을 막아섰고 인도로 행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집회신고가 안 되어 있다는 이유였지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영등포역에서 국회로 가는 도로는 이런 저런 명목의 행진이 신고 되어 있어 행진로가 겹친다는게 집회신고 금지통고를 한 이유였습니다.

항의하던 참가자들은 곧 좁은 인도로 올라섰고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차도를 따라 대열을 따라올 뿐 행진을 막지는 않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30분쯤 지나자 경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도마저 막아서면서 영등포역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참가자들은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채 국회 앞에서 날리기로 했던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다시 인도를 통해 영등포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주변 도로 어디에서도 ‘장소가 충돌한다는’ 집회나 행진은 없었습니다.

2005년 전용철?홍덕표 농민 사망사건, 2006년 건설비정규노동자 하중근 사망사건, 최근 민중총궐기 등 평소에는 준법을 강조하던 경찰이 노골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양쪽이 물리력으로 충돌하게 되고 강한 쪽이 이기는 법인데, 승자는 언제나 경찰입니다. 간혹 집회 참가자들의 수가 적거나 기자들마저 떠나 ‘보는 눈’이 없을 때는 아예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이날도 경찰 책임자는 “왜 가로막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방패를 든 부하들을 동원할 뿐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분한 마음에 온몸이 떨리지만 소리치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날개가 있다면 비웃어주면서 날아가 버릴텐데…….’ 우스운 얘기지만 서럽다 못해 경찰에게 사정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지요. 이날처럼 법보다 주먹이 가까움을 절감하는 날이면 제가 법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현실이 법조문을 배신할 때 어떻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살까요?

헌법은 집회?시위의 권리를 보장한다지만 집시법은 경찰이 입맛에 맞지 않는 집회를 갖은 이유를 들어 금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무늬만 신고제’이지 ‘사실상 허가제’입니다. 집시법은 집해 방해 행위를 금지하고 있고 방해할 염려가 있을 때는 경찰에 보호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집회를 방해하는 것은 오히려 경찰입니다. 최근 경찰과 언론은 집회?시위를 ‘저지’하는 수준을 넘어 ‘공공의 적’으로 매도하고 있지요. ‘집회는 과격하다’는 게 오래된 악선전이라면 요즘은 ‘교통체증 유발자’라는 새로운 선전기법으로 시민들을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참가자들의 복장을 규제하는 법안이 발의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지요.

그동안 인권운동은 표현의 자유의 한 영역으로 집회?시위의 자유를 옹호해 왔고 집시법 개정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하지만 법제도는 6월 항쟁 이후 점점 더 개악되고 있고, ‘데모할 권리’는 보편적인 ‘인권’이 아니라 집회?시위 참여자들의 ‘이권’으로 치부당하고 있습니다. 시민운동은 물론이고 민중운동도 불안감은 가지고 있겠지만 점점 더 합법 공간에 적응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러다보니 부당한 집시법에 대한 저항은 개악 당시에 잠시 일다가 ‘찻잔속의 태풍’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정규노동법 개악이나 노사관계로드맵 입법에 대한 국회의 태도를 보면, 국회를 경유할 수밖에 없는 법개정을 국회 스스로 용인할지 정말 의문입니다.

노점상으로 꽉 찬 영등포역 근처 인도는 한 줄로 걷기에도 무척이나 비좁습니다. 경찰에 막혀 국회 반대편을 향해 흐르는 깃발은 어디서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발걸음도 무겁습니다. 바삐 지나는 사람들은 얼굴 없는 노숙인 동료의 영정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터벅터벅 걷다가, 어쩌면 지금 할 일을 피해 달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애초 집회?시위의 권리를 지킨다는 것은 거창한 다른 무엇이 아니라 ‘목소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저들의 방패를 지금 가로지를 수 없다면 나중에 법적으로 배상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당장 쓸 수 없는 권리라면 권리라 이름붙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국회 앞에 가서 억눌린 분노를 평화적으로 표출하는 일조차 금지 당했는데 너무나 평화롭게 돌아온 것은 아닌지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악법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불복종이라는 교훈을 되새겼습니다. 법과 관행의 변화도 이런 불복종이 쌓이고 쌓여야 가능한 일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