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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현대차 희망버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모여듦’

현대차 공장 울타리에 밧줄이 걸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밧줄이 걸렸는지 볼 수도 없을 정도의 속도로 소화기 분말이 시야를 가렸다. 소화기를 얼마나 뿌려댔는지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앞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 분말을 다 마시고도 물러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끌어당긴 울타리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울타리 안쪽, 현대차 직원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소화전 호스를 끌고 왔다. 호스의 끝에서 물줄기가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맞으면 휘청거릴 정도의 물줄기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감히 보려는 자들에 대한 복수인 듯 사나웠다.


공장의 울타리는 인권의 경계

그렇다. 공장의 울타리는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을 숨기는 벽이었다. 현대차의 모든 사내 하청이 불법 파견이라는 노동부의 판정을 받은 것은 2004년이었다. 2010년에는 대법원의 불법 파견 판결도 있었다. 현대차가 하청업체의 직원일 뿐이라고 말하는 노동자들이, 현대차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임에 분명하다는 것이 사법부 판결의 의미다. 그러나 현대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장 옆 주차장의 철탑에 두 명의 노동자가 오른 지 270일이 넘도록 사법부의 판결조차 공장의 울타리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공장의 울타리는 인권이 들어갈 수 없는 벽이었다. 지난 10일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부분 파업을 벌였을 때 사측은 용역 천 여 명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폭행했다. 어떤 사람은 사지마비에 이를 수도 있는 흉추 골절을 입었다. 비정규직지회장은 차에 감금되기도 했다. 거리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조직폭력이지만 공장 안에서 벌어질 때는 전혀 다른 사건이 된다.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조직폭력을 당하고도, 먼저 잘못했다고 책임을 추궁 당해야 한다. 생명과 신체의 안전에 대한 침해는, 노동자가 자초한 것이 되어 버린다. 파업은 권리가 아니라 범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파업에 대한 형사처벌과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가압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노동자’는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걸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공장 안으로 들어갈 때 인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은 내려놓아야 할 것을 더 많이 요구한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보장받아야 마땅한 고용안정성, 임금, 휴가, 4대 보험과 같은 것들만 포기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밖에 못 되는 주제에”, “그 따위니까 니가 비정규직밖에 못 하지”와 같은 모욕은 일상이다. 재계는 솔직히 말한다. 생산을 유연화하기 위해 비정규직이 필요하다고. 필요할 때 일을 시키고 필요 없을 때 버리기 쉽도록 하겠다는 말을 태연자약하게 한다. 어느새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사람들에 붙는 이름이 되어 버렸다. 인권이 들어갈 수 없는 자리는 사람의 자리가 될 수 없다. 공장 안도 사람의 자리여야 한다고 마음과 뜻을 모은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탔다.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 다음 질문을 던져야

희망버스가 울산에 다녀간 후 재계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외부 세력의 개입을 비판하며 들고 일어났다. 경찰은 엄정한 수사와 처벌을 외치며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했고, 언론은 ‘폭력’을 문제 삼으며 희망버스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울타리가 무너진 자리에 이내 더 견고한 펜스가 세워진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억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버티기로 일관하던 재계와 언론이 이제야 인권을 외쳐온 사람들의 힘을 감지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2년 전 희망버스에서도 똑같이 들어야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다시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힘이 ‘희망버스’를 통해 모이기 시작했다는 점 자체에 있다.

물론 그 힘은 ‘폭력’을 통해 드러났다. 계획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떤 물리력이 사용됐는지 따지기에 앞서 그 곳에는 ‘폭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들은 언제나 지배적인 질서에 맞서는 목소리였고, 그것은 안타깝게도-그리고 역설적으로- ‘폭력’으로 역사에 자취를 남겨왔다. 그러나 동시에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 끈질긴 모색과 실천을 이어온 것 역시 인권의 역사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폭력’ 너머의 폭력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가담해있는 폭력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무엇을 만들어내야 할지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이다. 인권은, 인권이 실현되는 질서에 대한 권리이므로.

울산 현대차 공장의 무너진 울타리는,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결코 쉽지 않다. 울타리가 뜯겨나간 자리에 날 것으로 드러난 ‘폭력’은 인권의 경계를 확인시켜준 ‘폭력’이었을 뿐이다.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서도 그 다음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권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공장의 관리자들이, 경비용역이, 경찰이 만들어내는 경계가 아니다.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책으로 옮긴 스터즈 터클은 “‘일’을 주제로 한 이 책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책”이라며 서문을 연다. 크고 작은 상처나 사고뿐만 아니라 홧병과 자괴감 등의 폭력이 ‘일’을 압도하도록 만든 힘은 자본이다. 우리가 먹고살고 서로 먹여 살리는 관계의 고리가 되는 ‘일’은, 그의 책(한글판) 제목처럼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서에 붙들려 있다.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계속 모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자본은 우리들이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질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모여듦’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순간 우리들의 관계가 질서를 비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 모여야 하는 이유

희망버스가 다음을 기약하던 21일 오전, 서울에서는 노량진 배수지 수몰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곱 명의 노동자들의 합동영결식이 치러졌다. 물에 휩쓸려 사망한 한 노동자는, 비가 많이 온 터라 일을 안 하면 좋겠다는 말을 하며 일하러 나갔다고 한다. 일을 하는 사람이 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노동자’가, 일이 위험할 수 있으니 조금 미루자고 하는 것은, 더 나아가 위험한 일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일을 잃게 될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이 들어가야 했던 배수지 입구는 이미 인권이 들어가지 못하는 경계였던 것이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시공사, 감리단, 하청업체 등으로 이어지는 고리의 어디쯤에 사고의 원인이 있는지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연쇄 고리 자체가 일을 하는 사람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박탈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다.

모두가 추모하는 가운데 합동영결식이 치러졌지만 마음이 부대꼈다. 그들의 원통한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만은 아닌데,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질문들을 간직하는 애도는 개인의 것들로 흩어지고, 그들을 죽음으로 휩쓸고 간 물줄기는 또 다른 모습으로 누군가의 삶을 앗아갈 텐데, 이 견고한 질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모여듦’을 불온시하고……. ‘희생자’인 개인의 죽음은 위로하지만 인권을 외치는 집단의 힘은 철저하게 차단당하는 시대, 그래서 우리는 더욱 모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