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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교수, 국가인권위 위원직 사퇴 성명]

국가인권위원을 사임하면서

곽노현(방송대 법학과 교수)

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위원장의 비민주적인 운영철학 및 사무처중심의 운영구조, 그리고 전략과 기획 마인드가 결여된 업무수행 방식에 대한 마지막 항의의 뜻을 담아 오늘자로 국가인권위원직을 사임한다.

인권위는 초기부터 위원장의 감수성 및 지도력 부족과 위원들의 전문성 및 사명감 부족으로 내외적으로 다방면의 불협화음을 키우면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인권단체는 물론 (상임)위원마저 위원회 일로부터 배제, 소외됐다.

현재 상임위원들은 실질적으로 사무실 있는 비상임으로 자리매김돼서 어떠한 실질적 기능도 못하며 예산을 축내고 있다. 비상임위원들은 종합적인 국가인권위원이 아니라 진정사안에 대한 심판위원으로 전락했다.

인권위는 인권단체들의 지지와 협력 없이는 존립이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국가기관이다. 위원장과 위원들은 여기에 대해 투철한 인식과 의지가 없고 인권단체들에 대한 안건공개, 정보공개, 자료공개, 현안협의 등에 인색하다.

인권위는 철저히 독임제화했다. 최고의사결정권자인 전원위원회는 진정구제안건을 다룰 뿐 조직운영이나 인권현안, 심지어는 정책제도개선사안조차 다루지 못하도록 껍데기만 남았다. 소위간 권한불균형과 업무불균형은 누구의 눈으로 봐도 명백한데 위원장의 오만과 독선, 위원들의 무기력, 기득권 기타 이해관계 등이 얽혀서 1년째 이것마저 고치지 못한 채 사무처와 위원들간에 볼썽사납기 그지없는 진흙탕 싸움만 계속되고 있다.

업무수행방식도 문제다. 위원회는 현재 진정사안 처리에 매몰돼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인권현안들에 대해 인권단체 기타 전문가들의 자문과 협력을 받아, 실태조사, 장기(長期)청문회, 연구용역, 직권조사, 방문조사, 자료제출요구, 관련 공사기관 협의요청, 기타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전사회적인 인권교육홍보효과를 수반하는 가운데 그 결과물로 제도개
선권고를 내놓고 이를 관련기관이 준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도록 만드는 일인데 이제까지 이런 시도조차 없었다. 그 결과 인권위는 인권현장 기타 보여야 할 곳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관행과 룰을 존중하면서 내부에서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현상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집행부의 오만과 독선 및 위원들의 소극성과 무기력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했다. 인권단체와 손잡고 내부투쟁을 벌이는 방법이 남아있지만 이것은 현재의 인적, 제도적 구조 아래서 내부대립과 편가르기를 심화시킬 뿐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현재의 인권위는 위상, 예산, 권한, 규모에 걸맞은 일을 못하고 있다. (상임)위원들에게도 탓이 있지만 가장 큰 탓은 집행부의 전략기획 마인드 부재 및 오만과 독선에 있다. 이는 특히 위원회가 위원장의 독임제화, 사무처중심주의화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국가인권기구공대위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입법투쟁을 3년간 이끌고 인권단체의 추천을 받아 인귄위원의 말석을 차지한 사람으로서 나의 양심과 양식으로는 도저히 이처럼 입법정신과 거리가 멀어지고 실질적으로 관료제화한 인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우리가 꿈꿨던 인권위와 현재의 인권위는 그 정신과 철학, 문화와 관행이 100% 다르다. 봉사조직, 시민단체, 국제기구의 장점을 두루 갖춘 21세기형 국가기관으로서 민중을 섬기는 열린 국가기관, 낮은 고통의 현장에 기꺼이 달려가 억울한 고통을 체감하며 불의와 싸우는 용감한 국가기관, 이런 모습과 거리가 멀다. 겉으로는 분주하되 안으로는 철학과 생명이 없다. 특히 위원장과 위원들에게 없다. 나의 사퇴가 위원장과 위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위위원회가 제자리를 찾는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2003.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