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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폭력으로 희생된 시민을 위한 추모가 ‘표현의 자유’로만 머무를 수 없는 이유(20150114)

1월 7일 프랑스 만평전문 주간지 ‘사를리 앱도’에 대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테러 직후, 수백만의 시민들이 ‘내가 샤를리다’라는 피켓을 들고 광장에 모였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사를리 앱도’가 그동안 다룬 풍자의 방식이 프랑스에 거주하는 무슬림인에게 어떠했을까를 떠올리면, 폭력으로 희생된 시민을 위한 추모가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어떤 직관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글을 현재 프랑스에서 슬픔과 분노, 공포의 감정을 느끼며 광장에 모여 있을 시민들에게 보내고 싶습니다. 먼저, 이번 폭력사태로 사망한 분들, 또한 그/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물리적인 힘을 동원한 극단적인 폭력을 반대하며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을 통해 유럽에서 벌어지는 반테러조치라든지 이민정책을 악용하는 모습을 보며, 독일에 거주하는 친구의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 제 친구는 산티아고 길을 걸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친구를 만나 함께 순례의 길을 걸었어요. 그런데 길에서 만난 친구는 특정 시간만 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했고, 답답한 제 친구는 물었죠. 도대체 어디로, 왜 사라지냐고! 그러자 그 친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은 독일계 이슬람인이고, 종교의식을 하느라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갑자기 제 친구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했답니다. 유럽 사회에서 무슬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얼음 같은 사회생활을 감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잠시나마 경험했다고 해요. 더불어 제 친구는 친구를 의심했던 마음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모욕으로 느껴지는 ‘사를리 앱도’의 풍자

프랑스에서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어쩜 제 친구의 친구가 경험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가톨릭, 개신교, 불교를 종교로 갖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종교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많이 규정하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를리 앱도’에서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방식이 어쩌면 자신에 대한 풍자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풍자당하는 무함마드가 자신으로 동일시되는 것에는 프랑스 주류 사회에서 사회적인 배제 상태에 놓여있는 무슬림인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췄을 것입니다. 이슬람의 예언자를 풍자하는 것이 그 어떤 절대 권력을 풍자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있는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 프랑스계 무슬림인에게 무함마드는 절대 권력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무함마드는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벗이지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지가 되는 존재이며 삶의 길을 안내하는 예언자 입니다. 그런데 권력을 갖고 있는 프랑스 사회가 무함마드를 풍자했을 때 그것은 풍자가 아닌 모욕과 조롱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무슬림인이 프랑스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험난합니다. 2004년 프랑스 정부는 공립학교에서 종교 복장을 착용하도록 하는 것을 금지하는 히잡착용금지법을, 2010년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을 금지하는 브리카금지법을 만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게다가 경제․사회적으로 배제를 겪고 있는 프랑스계 무슬림인에게, 프랑스식 똘레랑스는 과연 존재할까요? 프랑스계 무슬림인에게 똘레랑스는 없을 것 같습니다. 

광장에 모인 프랑스 시민들이 ‘표현의 자유’를 중심으로 연대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은 아마도 프랑스 사람들이 지키고 싶은 ‘프랑스적 가치’에 가까운 그 어떤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근대시민 혁명을 통해 만들어낸 계몽가치와 68혁명 이후 탄생한 다원성의 가치에 사실상 무슬림은 배제된 존재들입니다. 유럽의 여느 국가처럼 경제호황기를 지난 프랑스에서 이민자들은 일한 곳도 살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프랑스 국가의 필요에 따라 무슬림인을 이민자로 받아들였다가 이제는 본국으로 떠나라는 메시지가 이민자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올까요. 경제․사회적 차별은 삶을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며 문화․심리적 배제는 무슬림 이주민의 삶을 ‘고립’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지경입니다. 

페이스북에서 지지를 얻고 있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이렇듯, 무슬림 이민자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단면은 왜 ‘사를리 앱도’ 만평이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불편함을 넘어 모욕으로 다가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모욕은 단지 감정의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욕을 유지․확대하고 있는 프랑스 내 이슬람 이주민의 삶의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이를 반영하듯 페이스북에서 ‘내가 샤를리다’라는 집회 모토에 맞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는 페이지를 지지하는 사람이 2만여 1천여 명에 이릅니다. 프랑스계 무슬림들은 ‘사를리 앱도’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지만,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프랑스계 무슬림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배제와 차별은 언제나 그들에게 구조적인 ‘폭력’이었습니다. 이런 맥락 없이,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표현의 권력(*)’을 주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인에 대한 폭력과 혐오가 더 확산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스럽습니다. 프랑스 안에서도 자칫 국민전선(FT)과 같은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프랑스 정부는 반테러조치라는 이름하에 시민을 감시하고 경찰력을 강화하며 이민정책을 악용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서는 안될텐데요. 

증오와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 우리의 힘

이번 폭력 사태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은 아닐 겁니다. 한국사회도 극단의 시대를 보여주는 징후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도 세계 경제 위기를 피해갈 재간은 없습니다. 이를 틈타 일베 등이 이주자를 향해 끊임없이 내뿜고 있는 혐오와 조롱, 증오 발언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이번 폭력 사태가 혹시 한국사회에 정주하고 있는 이슬람계 이주민을 경계하고 ‘폭력이나 테러’와 연관된 편견으로 강화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최근 사회적 약자와 권리가 박탈되어 싸우는 사람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점 역시 주의를 기울여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증오와 혐오의 정치를 견딜 수 있는, 또 넘을 수 있는 인간존엄에 관한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 ‘표현의 권력’: 정희진, 2014,『정희진처럼 읽기』, 교양인, 126~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