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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파랑과 분홍 사이 무지개

5월만큼은 아니겠지만 12월도 돈이 나가는 달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카애자(혈연의 여부와 관계없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아이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 하는 이모, 고모, 삼촌의 정신적 DNA를 가진 자라고 해두자) 중의 한 명으로, 신부 입장 때부터 피로연 종료 시간까지 장례식장에서도 이보다 더 울 수는 없겠다 싶게 대성통곡을 하게 만든 친구의 아이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것이 올해 12월 나의 미션이었다. 임신기간 중 종종 연락과 만남을 지속하면서도 “아들이야 딸이야”라는 질문을 단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것은 세상에 여자 혹은 남자로 ‘태어난다’라는 것이 성별정체성의 다가 아니라는 생각 탓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둘 중 하나로 일단 태어났고, “무슨 옷을 입힐 것인가”로 시작되는 젠더 수행의 장에서 아이에게 파랑도 분홍도 아닌 무지개색 우주복을 골라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아름다웠다.

성별 고정관념, 더 이상 팔지 않는다 전해라

디즈니는 홈페이지에서 아동용 의상 판매 카데고리를 ‘여자아이를 위한 것(for girls)’과 ‘남자아이를 위한 것(for boys)’이라는 성별구분을 없앴다.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한 장난감과 의류, 책에 특정 성별을 위한 것이라는 구분을 하는 것을 지양하는 흐름이 시작되고 있다.

스페인 장난감기업 토이 플래닛은 유모차를 밀거나 소꿉놀이, 인형놀이를 하는 남자아이, 전동공구를 가지고 놀거나 그간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여겨지던 로봇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를 등장시키는 광고를 내보냈다. 미국의 골디블락스는 엔지니어 출신의 여성이 차린 회사다. 전 세계적으로 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분야에 대해 어린 나이부터 흥미를 가지게 할 수 있는 장난감들은 남자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여겨져 왔다면서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공학 장난감을 만드는 것에 주력하며 성별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광고영상(하단 관련사이트 참고)을 선보이고 있다.


남자아이(위), 여자아이(아래)를 위한 장난감 광고에 많이 사용하는 말들 (출처: http://www.lettoysbetoys.org.uk)

▲ 남자아이(위), 여자아이(아래)를 위한 장난감 광고에 많이 사용하는 말들 (출처: http://www.lettoysbetoys.org.uk)


영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장난감 산업과 출판 산업의 젠더 구분 철폐와 관련한 캠페인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홈페이지에 게재된 캠페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렛 토이즈 비 토이즈 (Let Toys Be Toys)는 장난감 산업과 출판 산업에 특정 장난감과 책들은 여자아이를 위한 것이고, 다른 것들은 오직 남자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광고를 통해 아이들의 흥미를 제한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요구한다. 장난감은 재미, 배움을 위한 것이고, 상상력을 쌓고 창의력을 돋우기 위한 것이다. 아이들은 그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장난감을 선택하는데 자유로워야 한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놀아야 하는지 이야기함으로써 상상력을 제한하는 일을 그만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대답은 간단한다 – 우리는 생산자들과 판매자들에게 젠더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능이나 주제에 의해서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택하게 하자. (홈페이지 링크)

우리를 그저 우리 자신이게 Let Us Be Us

무엇보다도 자본이 가장 발 빠르게 이슈를 선점한다는 점에서 씁쓸하기는 하지만, 이분화된 성별정체성과 그에 딱 달라붙어 있는 성별 고정관념이 결국에는 젠더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고리라는 점에서 이런 변화들은 환영할 만하다. 반년이나 지연되다가 지난달 발표된 성소수자 차별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소수자가 겪은 괴롭힘 경험은 “등록된 성별과 외관상 성별이 일치하지 않거나 트랜스젠더인 경우 더 많이 발생했고, 성소수자 학생이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로 평가될 경우, 63.9%가 놀리거나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경험이 있고, 36.1%가 아웃팅을 당하였으며, 27.8%가 아웃팅의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태어난 성별과 무관하게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다르게 몸을 사용할 수 있다면- 소년이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르고 소녀가 공구를 가지고 놀고 근육을 키우고 뛰어다닌다면, 그것이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여자답지 못하다’거나 ‘여자같다’거나 ‘진짜 여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일어나는 젠더폭력이 줄어들지 않을까. 다양한 젠더 수행이 더 많이 보일 때, 다른 젠더로 살아온 삶 역시도 무시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부모 혹은 조카애자들의 개인적인 결단들과 장난감, 아동복 시장의 자그마한 변화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개인적인 선택들로는 낙관할 수 없는 현실이 한국에 있다. 성별 고정관념과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성교육 표준안이 폐기되지 않은 채 벌써 이 안으로 일선 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할 교사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남자 같은 남자’와 ‘여자 같은 여자’라는 고정관념을 유지하고 다른 다양한 젠더 수행을 단죄하고 교정하려는 시도가 폭력이라는 것을 더 열심히 알리는 것이 새해의 과제인 듯하다. 2016년은, 우리를 그저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자유로 한발짝 더 갈 수 있기를.

(*) “무관심과 무정책 속에 방치되는 성소수자 학생들”, 2015.12.16, 김정혜
덧붙임

나기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