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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혐오의 시대, 최고의 사랑

“그럼요. 그런 사랑도 가능하죠.”

가끔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를 이해한다며 해주는 말이지만, 이제는 이런 말이 고맙지도 않을뿐더러 가끔 이렇게 되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요? 근데 당신이 하는 거는 사랑이 맞나요?”

‘최고의 사랑’이라고 JTBC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예능프로그램이 있다. 남녀 연예인들이 가상 결혼생활을 하는 식상한 플롯이지만, 여기의 김숙-윤정수는 사뭇 다른 ‘케미’를 뿜어낸다. 이들은 ‘이런 게 바로 사랑’이라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질구질할 법한 결혼 생활을 드러냄으로써 대체 삶 앞에서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질문하게 할 뿐이다. 이상적인 남성성은 없고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인 여성성이 있는 가운데, ‘최고의 사랑’이라는 이성애 각본은 신랄한 풍자의 대상이 된다.

계약서를 쓰는 순간부터 쇼윈도 부부를 표방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사랑 따위는 기대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결혼생활을 위해 상대방의 부모와 형제들의 사정까지 탐색해야 한다는 너무나 솔직한 대화들로 인해 서로에게 기만적이지는 않을 뿐이다. 가진 돈을 무기로 결정적인 순간마다 가부장 남성을 미러링하며 “너 그러다 소박맞는다”는 김숙과 더 잃을 것도 없는 ‘파산남’으로 하루 중 청소할 때가 가장 즐겁다는 윤정수의 조화는 실제 현실에서는 사랑한다면 여성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면서 통쾌함을 준다. 성별만 바꾸어보면 사랑도 뭣도 아닌 권력관계의 작동, 때때로 모욕적인 역할 수행임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이성애’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정의되지만, 남자인 사람과 여자인 사람 사이의 사랑이 아니다. 사회가 규정하고 애써 유지시켜 나가는 남성 젠더 수행과 여성 젠더 수행의 짜여진 각본이다. 자신의 정상성을 시험해가며 어렵게 찾아낸 정체성도 아니며, 그래서 성적지향의 여러 스펙트럼 중에 하나로 쉽게 위치시킬 수 없다. 그럼에도 이성애가 보편적인 ‘사랑’이며 그 결과가 결혼이라는 시나리오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를 멈추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듯 연애하게 만들며 결혼해서 좀 더 잘 사는 게 최고라고 느끼게 만든다. 이성애주의에 터 잡은 기득권 세력에게 이 길에서 벗어나는 성소수자는 시민조차 아니며, 이성애에 복무해왔던 사람들에게는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혐오는 다시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게 하고 또 이로 엮이는 다양한 관계들을 왜곡해 나가고 있다. 동성 간의 관계도, 일대일 관계를 벗어난 사람들의 관계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혐오를 양산하는 이성애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너무나 절실한 과제는 이성과 연애하지 않기, 결혼하지 않기나 동성애 드러내기가 아니라 이성애주의적 각본을 지우고 토대를 흔드는 관계모델들을 더 많이 꾸준히 만들고 실천하며 드러내는 작업이다. 한편으로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젠더 수행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경계에 서서 만들어내는 관계, 또 한편으로는 소중한 사람이라면 가족이라 이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고 존중과 돌봄을 실천하는 관계들 말이다. 이런 근본 없고 토대 없는 사람들이 실천하는 관계들은 구성원의 성별 조합을 떠나 어떤 경우도 ‘이성애’는 아니다.

누군가에게 있어 가장 강렬한 사랑은 일 대 일 파트너십일 수도 있지만, 비슷한 삶의 지향을 가지고 함께 살아갈 사람들과의 연대감일 수 있고, 자기가 평생을 함께한 지역 커뮤니티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으며, 지금은 없는 존재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각각 다른 삶의 양식으로 펼쳐질 것이다. 사랑하면 떠올리는 최고의 상은 여전히 강력하게 하나이고 거기서 빗겨난 상태로 버틸 수 있을지 앞으로도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조금 다른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것도 맞다.

나는 이렇게나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가 만연한 때야말로 퀴어들로부터 사랑을 질문하고 관계를 보다 재밌고 다양하게 실천하는 감수성이 폭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체화한 전형적인 관계 상부터 하나라도 더 벗겨내야 하는 과제도 남아있다. 남성중심적인 예능계에 김숙이 보내는 일갈에서도, 젠더 퀴어를 향한 부치들의 움직임(언니네트워크 회원모임 부들부들)에서도 우리가 실천하려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영감을 주고받는 일상이 된다면 나는 이 암울한 시간들에서 희망을 찾으며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에게 최고의 사랑은 무엇인가?
덧붙임

야릉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