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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먼 옛날, 중국 전역에는 코끼리가 널리 서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기후가 변하고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포획하자 코끼리는 점차 사라졌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코끼리를 볼 수 없었다. 황하 강가에 있는 거대한 코끼리 뼈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길다란 어금니와 거대한 뼈를 가진 이 동물이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했다. 앞에 놓인 뼈를 보며 코끼리라는 동물을 생각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로 전혀 새로운 것을 머릿속 그려보는 ‘상상(想像)은 바로 코끼리를 생각한 상상(想象)에서 온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알고 싶은 보이지 않는 소년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지음/한울림어린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한 소년이 바람의 색을 찾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책장 앞에는 바람을 뜻하는 프랑스어 ‘vent'가 점자로 쓰여 있다. 책의 그림들은 모두 올록볼록하게, 맨질맨질 또는 거칠거칠하게 표현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도 함께 보기 위함이라 한다.
이 책은 그림이 인상적이다. 책을 손에 쥐자마자 찬찬히 책장을 넘겼다. 글보다도 그림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다 읽은 뒤에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책장을 넘기며 그림들을 보았다. 여유롭고 부드럽게 표현된 그림들은 바람을 찾아 나서는 소년의 여정을 편안하게 따라가도록 인도한다.
이전에 보았던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여행』 (메네다 코틴 지음, 로사나 파리아 그림/고래이야기)처럼 눈으로만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을 알뜰하게 깨뜨리는 동화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더욱 깊은 철학과 성찰을 품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바람이 궁금했다. 바람이 무엇이고 어떤 색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소년은 집을 떠나 바람을 찾아 나섰다. 소년은 여럿에게서 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소년이 물었다. “바람은 무슨 색이니?” 늙은 개는 말했다. “들판에 가득 핀 꽃의 향기로 물든 색, 그리고 빛바랜 나의 털색.”이라고 답했다.
소년이 물었다. “바람은 무슨 색이니?” 코끼리는 말했다. “조약돌처럼 둥글고, 시원하고 매끌매끌한 회색이지.”
소년은 어느 마을로 들어갔다. “바람은 무슨 색일까?” 마을은 답했다. “옷들이 나부끼는 골목의 색, 이야기를 간직한 지붕의 색이지.” 창문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야. 바람은 꽃과 풀이 자라고, 계절이 지나는 시간의 색이야.”

늙은 개, 늑대, 코끼리, 큰 산, 마을, 창문, 비, 꿀벌, 개울, 사과나무, 새... 모두는 소년에게 자신의 위치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람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년의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소년은 하염없이 걷는다. 그리고 아주 큰 거인을 만난다.

소년은 다시 묻는다. “바람은 무슨 색이죠?” 소년을 향해 몸을 숙인 거인은 답한다. “바람은 이 색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 색이기도 하지. 바람은 모든 색이란다. 네가 이 책 속에서 만난 모든 색처럼.”
소년은 책장을 스르륵 넘기며, 책에서 이는 바람을 느낀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아

우리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대개 우리의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말한다. 돈,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뿐만 아니라 나를 다른 이에게 증명하는 학위, 직장, 자격증 따위가 있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 삶 속의 가치와 신념들이다. 사랑, 꿈, 희망, 정의, 평화, 연대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세상에 있는 것들.

살다보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으며 살아가는 자신을 문득문득 발견한다. 또 시대와 사회가 그것들만을 바라보게 하고 강요한다. 모두들 자신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잊게 된다. 때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기도 한다.
아이들은 성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왜 배워야 하는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그 많은 지식들을 머릿속에 욱여넣기 바쁘다. 남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잔혹한 경쟁에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 청년들은 끊임없이 사회에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보다 얼마나 쉬지 않고 살아왔는지 증명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의미 없는 스펙들을 잔뜩 쌓는다. 내가 설 수 있는 위치를 얻기 위해 내 옆에 있는 이와 몸싸움을 해야 한다. 장년들은 자식을 키우기 위해, 막막한 노후를 위해 오직 생계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쉬지 않고 움직이고 또 움직여야 한다. 모두가 살아가는 것이 바쁘고 고단하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루 살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태도는 삶을 항상 부족하게 느끼게 하고 스스로를 외롭게 한다. 이 부족함과 외로움을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채우려 하지만, 이는 그것들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이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또 채우려 애쓴다. 삶의 모든 부분을 소비로 해결하려 하고, 내 손과 주머니에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채워 넣으려 아등바등할 뿐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아픔과 분노는 대개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세월호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잔혹함과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는가. 밀양의 송전탑은 마을 공동체를 갈가리 찢어 놓았고 다수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한다. 사회 곳곳에서 소수자로 구분된 사람들은 매서운 억압에 억눌려 있고 목숨을 내놓으며 변화를 부르짖지만, 사회구조는 굳건히 버티어 변하지 않는다. 이는 눈에 보이는 가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보다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지 못함으로써 서로에게 끝없는 상처를 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소년이 바람을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궁금했다. 그래서 바람이 존재하는 집 밖으로 나선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고, 삶 속에서 중요한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발달심리학자 삐아제는 발달 단계로 대상영속성을 이야기했다. 눈앞의 물건이 보이지 않아도 그 물건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능력. 우리는 가장 먼저 개인의 삶 속에서, 또 사회 속에서 무기력해진 대상영속성을 일깨워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 있음을.
소년은 다양한 이들을 만나 바람에 대해 묻는다. 만난 이들은 자신이 살아오며 본 색깔과 모양들로 바람을 빗대어 알려준다. 하지만 눈으로 세상을 본 경험이 없는 소년은 바람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색깔인지 알 수 없었다.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또 다른 이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소년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고민하며 삶을 돌아보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맥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답이 나를 설득하지 않고 내 삶의 태도와 맞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듣고 고민하는 여유를 품어야 한다.
소년은 거인을 만난다. 지금껏 소년이 만난 이야기들 모두가 바람이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소년은 책장을 넘기며 바람을 느낀다. 바람을 느끼며 소년은 자신의 말로, 자신의 생각으로 바람에 대해 스스로에게 답을 했을 것이다.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와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모아 바람을 상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상상하기’이다. 황하강 주변의 사람들이 코끼리 뼈 조각을 모아 거대한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했던 것처럼, 내가 경험했던 것들과 생각한 것들을 모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상상해 보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면 우리도 거인을 만나 소년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설명하려 애쓰고 있음을. 세상을 이루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서로서로가 기대어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 - 사막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덧붙임

김인호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