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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그림책 『벌집이 너무 좁아!』

1987년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생일 때 미국에서 한 아이가 우리 반에 왔다. 전학이 아니었다. 방학을 맞아 교장 선생님인 할아버지 집에 온 아이가 잠시 우리와 함께 학교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추측해보건대 한국어나 한국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손녀가 짧은 기간이나마 한국에서 학교생활을 하며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배정한 게 아닐까 싶다. 한 학년 2개 반에 한 반의 인원이 28명 남짓인 시골의 작은 학교에 미국에서 온 아이는 신기하고 이상한 존재였다. ‘외국(인)’은 책이나 텔레비전에서나 접하는 아주 낯설고 현실감 없는 무엇이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그 아이에게 호감을 사고 싶어 했던 건 같다. 서툰 발음, 부정확한 언어는 외국에서 왔다는 증명이었기에 놀림거리기 보다는 일종의 ‘세련됨’이었다. 그 아이의 옷이나 학용품과 같은 물건, 그리고 태도는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누구나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서 주변을 맴돌며 말을 건넬 기회를 노렸고 뭐라도 먼저 알려주고 싶어 안달했다.

이제 우리에게 이주민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이주민은 총인구의 4%에 달하고 시골마을에서도 곧잘 마주치는 이웃이 되었다. 그럼에도 익숙하고 친밀한 관계가 된 것도 아닌 듯하다. 지난 추석 전날 밤 음식장만을 마치고 부엌일을 마무리하던 엄마가 나를 불렀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했다. 이유인즉, 아파트 단지에 외국인이 많아져서 이제는 밤에 혼자 나가는 게 무섭다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왜 무서운데?’ 이렇다 할 이유를 대지는 못했지만 이 원인 모를 두려움은 실재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고들 하는데 거기서 비롯하는 경계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아이는 낯선 존재이지만 교장 선생님의 손녀라는 일종의 보증서를 쥐고 있어 경계를 무난히 넘어선 걸까? 아니면 우리는 막연히 외국에 사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해 경계심 자체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방인이라는 ‘낯선’ 존재는 누구이며 거기서 비롯한다는 ‘두려움’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벌집이 너무 좁아』(안드레스 피 안드레우 지음/고래이야기)는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두려움과 공포가 만드는 우리 사회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벌집이 좁아져 일할 때도 쉴 때도 불편을 느낀 꿀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왜 비좁아졌을까’ 회의를 열고 이를 밝힐 조사관 꿀벌 세 명을 뽑는다. 조사관 꿀벌들은 일주일 동안 샅샅이 조사한 결과 ‘우리 벌집에 꿀벌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라고 발표한다.
“아마도 외국에서 온 벌일 거야.”
“이민 온 벌일지도 몰라.”
“밖에서 날아 들어온 벌 한 마리가 우리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꿀을 먹고 있을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들은 그 ‘한 마리’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한다. 그 ‘한 마리’를 만난 적도 없고 꿀이 게 눈 감추듯 사라진 적도 없건만 꿀벌들은 알 수 없는 존재를 위험신호로 만들어 간다.
“아마 우리 벌집보다 더 작은 벌집에서 왔을 거야. 우리한테 병이라도 옮기면 어떻게 하지?”
“어쩌면 꿀 공장에서 내 일자리를 빼앗아 버릴지도 몰라.”
알 수 없는 그 ‘한 마리’는 벌들 사이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점점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러니 이제 위험한 존재, 문제의 원인인 ‘한 마리’를 찾아서 이 벌집에서 내보내거나 못된 짓을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제각각 ‘우리’라고 상정되는 꿀벌들을 식별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한다. 모든 벌들에게 번호를 매기자, 꿀벌 출생증명서를 발급하자, 모든 벌들의 윙윙 소리를 들어보고 우리와 다른 소리를 내는 벌을 찾아내자 등. 국민임을 증명하는 등록번호, 출생증명을 통한 식별, 언어나 식습관 등의 문화를 통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우리 사회의 그것과 똑 닮은 방안들이 쏟아져 나온다.

꿀벌들은 그 ‘한 마리’가 여기보다 작은 벌집에서 왔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진 꿀을 먹어 우리의 자원을 훼손할 거라고 여긴다. 여기보다 못한 곳에서 왔으니 우리 꿀벌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게으르고 불결한 존재로 상정되어 병을 옮길지도 모르는 위험군으로 둔갑한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상 그것은 아주 쉽게 기정사실이 된다. 문제의 원인을 색출하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 ‘문제’를 제고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다른 가능성들이 들어설 자리는 비좁아진다. 불안이 불안을 먹고 자라면서 대상에 대한 분노와 혐오로 번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모든 위기나 위협을 ‘한 마리’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다행히 그림책에서는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전에 누군가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 더듬이를 가지고 있지요?”
“우리 모두 배에 노란색 검은색 줄무늬가 있지요?”
“우리 모두 벌침을 가지고 있고 꽃에서 단물을 모아 와 꿀을 만들지요?”
우리 모두 벌(사람)인데 그의 출신지역 혹은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위험인물 혹은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묻는다. 이제 그 ‘한 마리’를 찾아내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보다 애초에 우리가 느낀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집이 좁아져 불편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찾으면 될 일이다.

“어쩌면 우리 벌집에 침입자가 하나 있는 게 아니라 방이 하나 모자란 것은 아닐까요? 침입자를 찾는 대신 그 시간에 모두 힘을 모아 벌집에 방 하나를 더 만들면 어떨까요?”
비로소 꿀벌들은 그동안의 편견과 불안에서 헤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한 방을 만든다. 그림책에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여왕벌이라 조금 아쉬움이 있다. 여왕이라는 그의 지위와 힘이 실린 말이기에 다른 꿀벌들이 이견 없이 수용한 건 아닌지. 만일 가장 나이 어린 벌, 혹은 날지 못하는 그래서 꿀을 만들기 어려운 꿀벌이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은 있지만, 꿀벌들은 멋진 해결책을 찾았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너무나 간단하고도 명료한 명제라고 해도 이를 실천하기는 복잡하고 버거운 세상이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안의 원인 모를 불안과 두려움을 추적해보거나 잠깐 멈춰보는 시도는 해봄직 하지 않을까.
그림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면 더욱 시도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덧붙임

묘랑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