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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퀴어페미니즘의 서막

며칠 전, 명 망있는 한 여성단체의 활동가가 들려준 이야기. 단체의 SNS 계정으로 이런 요지의 메시지가 띠록했다는. “성소수자운동은 언니네트워크 같은 레즈비언 단체에 맡기고, 우리 단체는 여성 운동에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대체 무엇이 여성운동이고, 무엇은 여성운동으로 분류될 수 없는지, 그 분류는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만들었는지, 그렇다면 여성가족부가 성평등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한 근본 없는 처사도 지지하신다는 건지, 대체 저 말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따지기 전에. 나는 웃.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언니네트워크 회원들도 모두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웃을 수 있게 되었다.(만세!) 단체 설립 이후 지금까지 줄기차게 듣고 있는 ‘틀린’ 명칭. ‘언니네 네트워크’만큼이나 오래, 자주, 많이 들어온 질문. “언니네트워크는 레즈비언 단체인가요?”

지난 10년, 의문문은 평서문(언니네트워크는 레즈비언 운동을 하는 단체이다)으로 변했고, 이제 아예 정의(언니네트워크는 레즈비언 단체)가 되고 있나 보다. 질문이 정의로 변모하는 시간 동안 우리의 답도 조금씩 달라졌다. ‘언니네트워크의 설립목적, 모든 종류의 성적 차별 및 억압이 종식된 새로운 사회 구현 안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도 포함됩니다.’에서 ‘레즈비언 운동‘도’ 하는 여성주의 단체입니다’를 지나, ‘우리의 페미니즘은 퀴어!’를 외치는 모습으로.

언니네트워크는 이상하다

그렇다. 어느새 언니네트워크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성소수자 운동 단체가 되었다. 물론 언니네트워크의 활동가가 모두 다 성소수자이거나, 회원들이 성소수자 문제에만 관심이 있거나, 우리의 주요 이슈가 성소수자에 한정되어 있지 않지만. 이런 식상하고 재미없는 열거들은 필요 없이. 우리는 열심히 성소수자 운동을 하는 단체이다. 그리고 언니네트워크를 ‘성소수자운동 단체’로 호명해 주는 것은 이제 우리에겐 칭찬이다. 우리가 제법 그 운동을 잘해왔다는 뜻을 분명 내포하고 있는 것일 테니.

하지만 나에게 누군가 언니네트워크를 한 줄 요약하라고 한다면, 대답은 여전히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의 혐의처럼 여성주의의 우산을 쓰고, 안전하게(?) 레즈비언 운동을 하겠다는 비겁한 수작이 아니다. 언니네트워크가 정말 열심히 성소수자운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여성주의가 그러하다고, 그러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언니네트워크는 늘 이상하다. 여성단체 같기도 하고, 성소수자 단체 같기도 하고, 정체성이 중심인 단체 같기도 하고, 지향으로 뭉친 단체 같기도 하고.

실은 태생부터 그랬다. 남자와의 연애경험이 다분하지만 자신은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하는 꼴페미와 바이섹슈얼을 찬양하는 부치와 정치적 레즈비언까지 경험한 시스젠더 여성과 자신은 철저한 이성애자라고 우기는 남성과 성적지향 따윈 중요하지 않은 비혼인이 함께 어울려 만든 조직이었다. 신기한 건, 시간이 흐르고, 활동가들이 바뀌어도, 이상한 구성인자의 조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언니네트워크는 이 태생적 한계(!)와 현재에도 변하지 않은 모호함을 주된 재료로, 아주 퀴어한 페미니즘을 빚고 있는 중이다.

모든 여성주의는 퀴어하다

나는 ‘퀴어(queer)'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게 좋았다. (하필이면 이상하게 좋았다니,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은 분명한가보다.) 기묘하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이 단어는 어느새 나를 설명하고, 또 내가 속한 단체(언니네트워크)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언니네트워크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페미니즘은 퀴어하다고.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아직도 차별받으며, 권력의 열세로, 소수자로 살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똑같이 배우고, 똑같이 일하는 여성들이 더 높은 취업의 문턱을 넘어야 하고, 더 낮은 임금을 지급받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정부의 성폭력 예방 캠페인과 교육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가 눈곱만큼도 줄어들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함께 일을 하고도 여성이 몇 배의 가사노동을 떠맡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직도 여전히 여성에게 세상은 이상한 일들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일은 수백 년 전 마녀로 지목당해 처참히 살해당했던 여성들부터, 여전히 해마다 명예살인으로 희생당하는 수천 명의 여성들까지. 그렇게 죽여도 그만인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제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 외치는 것일 테다. 이것은 너무나 괴이하고, 기괴한 일이다. 그러니 어떻게 페미니즘이 퀴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모든 페미니즘은 퀴어하다고. 만약 지금 그렇지 못한 페미니즘을 하고 있다면, 당장 퀴어해지라고.
덧붙임

난새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