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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녹보라, 우리 지금 만나] 여성생태운동, 변화의 시간을 길게 보기

다섯 번째 이야기 : 녹과 보라가 만드는 이야기

다섯 번째 가나다 토론회의 주제는 ‘녹과 보라가 만드는 이야기’. 네 차례에 걸친 노동, 환경, 여성운동의 속내 이야기에 이어 다섯 번째 토론회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지점들은 어디인지,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어떤 연대와 교류가 가능할 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만남은 ‘녹’과 ‘보라’. 환경운동연합의 김종남 사무총장님과 성공회대학교에서 실천여성학을 강의하시는 허성우 님이 이야기 손님으로 자리해 주셨다.


여성 환경운동가는 많지만 활동방식의 변화는 아직 먼 길

김종남 님은 “개인적으로도 여성성이나 여성주의적 관점에 대한 훈련이 별로 안 되어있었다”고 이야기하며 오히려 환경운동을 하고 생태주의를 알게 되면서 생태주의와 여성주의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변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여성주의와 생태주의가 만나는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여성환경연대’와 같은 단체도 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지속가능한 공존,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바탕을 만들기 위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볼 때 두 영역은 중요한 연대의 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에서는 만날 기회도 별로 없고, 함께 어떤 활동들을 기획하기도 어려운 것일까?

김종남 님은 그 원인 중의 하나로 환경운동의 운동방식이 여전히 남성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본인도 그런 부분에서 잘 변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과 함께. 한국 사회 대부분의 운동이 그러했겠지만 환경운동 역시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되었고 조직을 키우기 위해 무작정 달려오다 보니 남성 리더십들이 그 과정을 주로 주도했는데, 그 과정에 함께했던 여성들의 자세나 문화, 관계하는 방식 역시 남성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 전체를 운영하는 방식을 보면 주류 시민운동, 환경운동 단체들은 생태주의나 평등주의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사실은 문화나 행동 등을 보면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못하고 문화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많이 굳어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여건들이 여성주의 활동가들을 만나고 함께 활동하는 것을 어렵게 한 하나의 원인인 것 같기도 하다고.

다행히 현재 2,30대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그런 요구가 높아지고 있고 선배들의 권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들이 많다고 한다. 김종남 님은 좀 더 유연한 조직문화와 평등하고 열려있는 리더십, 소통방식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현재 본인을 비롯한 40대 초, 중반의 활동가들에게 큰 숙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여성활동가들의 다양한 활동들이 중요한 성과로 기록되거나 정치화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도 지적되었다. 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회의 경우, 초창기 환경운동을 시도했던 여성 그룹들이 여성주의적 시각과 활동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들을 해 온 만큼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관심을 가지는 내용들이 먹거리 안전, 생태교육, 생태적 소비에 관한 것들이다 보니 문화적 접근이 주로 이루어지면서 정치사회적 접근은 잘 안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환경운동 단체에서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활동하고 있음에도 그 활동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단위에서는 여성들의 비중이 절반에 못 미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허성우 님은 강의를 하며 만났던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은 민주노총의 할당제를 주제로 논문을 썼는데 할당제 이후 여성 지도부, 대의원이 늘어나는 성과는 있었지만 여성들 스스로가 힘을 키우거나 조직 내에서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가지기에는 여전히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적인 대표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여성활동가들끼리 그에 대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안산의 어느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던 다른 학생은 시화호 활동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처음에 시화호 생태를 발굴해낸 것도 여성들이고, 생태기행을 조직하거나 지역에서 주민생태교육을 주도적으로 기획한 것도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대사회적으로 전략을 결정하고 정부를 만나거나 투쟁을 지도하는 역할은 남성 상근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조직문화에 지친 여성활동가들이 스스로 생태여성주의적인 성향의 풀뿌리 소모임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런 활동들이 환경운동의 성과로는 전혀 가시화되고, 정리되지 않고 있다.

한편, 활동을 평가하거나 담론이 구성되는 과정들 역시 대부분 남성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그들이 어떤 정치인들을 만나고, 어떤 시위를 했는지를 중심으로 정리되고, 평가되기 때문에 여성 활동가들이 했던 중요한 역할들은 소외되거나 아예 빠져버린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허성우 님은 그런 점에서 조직화된 큰 단체들이 아니면서도 기존에 경계가 주어져 있지 않은 공간에서 여성주의적 가치를 가지고 저변을 넓혀 나가기 위한 공간들을 더욱 넓혀나가기 위한 시도들이 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여성생태운동의 현실에 대한 아쉬움들

생태여성주의의 이론적인 자원들이 상당히 많이 구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유통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도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 허성우 님은 주류 여성운동이 정치 주류화에 관심을 쏟다 보니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1992년 리우 환경회의에서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졌던 WED(Women, Environment and Sustainable Development; 여성, 환경,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와 같은 논의들조차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주변화되어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WED(더블유이디)는 인도의 칩코운동이나 캐냐의 그린밸트 운동과 같은 남반구 사회운동 속에서 등장한 논의로 1980년대 이후 환경과 개발에 관련된 국제회의에서 중요한 의제로 자리를 잡았다. 개발의 위기와 날로 심화되어가는 지구적 환경위기, 빈곤, 성차별의 심화 등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제안 속에 사회적 측면을 통합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보태지게 된 것이다. 1992년 리우 정상회담에서는 WED가 이정표가 되었으며 1991년부터 이를 준비하기 위해 모인 여성들은 ‘건강한 지구를 위한 세계여성회의’를 열고 지배적인 개발모델을 비판하는 공동의 입장을 ‘여성행동의제 21’로 모아내었다.(이미영, ‘지속가능한 발전과 여성 - 의제21의 성관점화(Engendering Agenda21)를 위해’, 여성환경연대)

또한 여성주의 생협 운동의 경우, 다수의 회원들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태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사회변화를 위한 흐름들과는 잘 연결이 안 되고 있다는 아쉬움도 지적되었다. 허성우 님은, 보라와 녹색의 연대를 지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기존에 한국 여성운동 내에서 이루어졌던 연대의 역사들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으며, 녹보 양쪽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한편, 여성주의 내부에서는 자연과 여성을 동일시하거나 모성, 돌봄, 평화의 아이콘으로 삼는 흐름들에 대해 이를 성역할을 본질주의화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으며, 여성들이 하는 환경운동 자체를 정치, 경제, 사회문화, 전체 구조를 바꾸는 사회운동이라기 보다는 그냥 여성들끼리 모여서 하는 소소한 일상의 활동인 것처럼 폄하해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김종남 님은 여성환경운동을 찾아 갔던 사람들은 주류 환경운동과 다른 방식, 의제를 찾아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들이 여성 건강문제나 노동 건강문제에 잘 접근하고 있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사회적, 정치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4대강 같은 정치화된 의제들과 비교해 볼 때, 삼성반도체의 문제나 생활재, 음식물 속의 발암물질에 관한 문제 등은 시장과 경제를 생태적으로 바꿀 수 있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중심적인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운동은 더 많은 여성운동의 활동가들과 환경운동의 활동가들이 지역이나 공동체에서 만나야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변화의 시간을 길게 보기, 천천히 우리의 연대를 만들어가기

많은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는, 생활 속에서 의제를 찾아내고 대중적인 실천들을 제안하는 운동들은 아직까지는 ‘탈정치적’이라거나 ‘개인주의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또는 ‘가족주의적인’ 운동이라는 비판들을 받고 있지만, 열심히 새로운 길들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성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생활운동이나 지역 풀뿌리 운동들이 낭만화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대안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위해서는 아마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당장의 급박한 정치적 이슈들을 해결하고 이를 중심으로 운동의 성과를 평가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10년, 20년의 흐름을 준비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운동 방식으로의 변화도 요구된다. 또한 김종남 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시장과 경제를 바꾸고, 삶을 바꾸는 생태운동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과정들에는 지금까지의 방식들과는 달리 의제의 제도화만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여성주의적이고 생태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여성의 역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성되어 왔으며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보다 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덧붙임

나영 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