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인권단어장

[인권단어장] 연대

[편집인 주]

[인권단어장]은 인권을 이야기할 때 흔히 쓰는 말들이지만, 그 의미를 얼버무리거나 소통이 어려운 단어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꼭지입니다.

A: 뭐해? 또 드라마 보고 있어? 맨날 똑같은 얘기인데 지겹지도 않니? 로맨틱이 아니라 완전 사기잖아 사기!
B: 환상이란 게 있는 거잖아. 사는 게 지질한데 드라마라도 환상이어야지.
A: 넌 아직도 백마 탄 왕자, 신데렐라 얘기가 그렇게 좋니?
B: 그건 아냐.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환상은 주인공 옆 친구들이야. 늘 하소연 들어주고 내 일처럼 같이 화내고 슬퍼하고 어려울 때마다 곁을 지키는 친구, 사실 그게 젤 비현실적 캐릭터지.
A: 넌 드라마에서 무슨 연대를 찾고 있니?
B: 갑자기 무슨 연대? 드라마 얘기하다 말고?
A: 돌봄, 관심, 감정적 결속, 인간적 유대, 넘치는 정…. 네가 찾는 환상이 이런 거잖아? 이런 걸 주제로 하는 담론이 연대니까 해본 말이야.
B: 경쟁, 공격성, 경멸, 모욕, 무시…. 뭐 이런 것들보다야 훨 듣기 좋네. 근데 왜 우린 그 좋은 걸 느낄 수 없는 걸까?

연대의 요청

A: 연대는 우리가 느끼는 사회상에 대한 대응이래. 우리가 맨날 불평하는 게 ‘사는 게 불안하다’, ‘다들 저밖에 모른다’, ‘사회가 왜 이 모양이냐’는 거잖아. 이런 사회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잘 안보이니까 연대에 대한 느낌이 오지 않는 것 같아.
B: 근데 뒤집어보면, 아쉬우니까 연대를 더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대라는 개념이 원래 사회에 문제가 있으니까, 심하게 말하자면 사회의 실패 때문에 등장한 거라잖아. 나는 지금 믿음 가는 안정적이고 친밀한 관계, 사회안전망이라 기댈 수 있는 지원 같은 게 정말 아쉽거든.
A: 아쉽고말고. 옛사람들이 끈끈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관계, 소속, 소속감, 이런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어. 가정, 직장, 노조, 국가? 이런 소속이 누구한테나 열려있지도 않거니와 간신히 속해 있다 하더라도 예전 같은 소속감을 느끼긴 어려워. 때론 그런 소속이 날 지원해준다긴 보다 오히려 부담주고 괴롭히는 것 같기도 해.
B: 우린 사회안전망이란 걸 제대로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그게 앞선 복지국가에서조차 쇠퇴하고 있다고 하지. 끈끈한 관계를 만들 만한 관계망에 들어가긴 너무 힘들어. 취직하긴 어렵지 잘리긴 쉽지, 노조는커녕 오늘 만난 사람이 내일도 같이 일할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어. 임시 일자리 가면 이름도 안 물어. 내가 내일 또 볼 사람이란 생각이 있어야 이름을 묻지.
A: ‘인간은 원래 상호의존하며 상부상조하며 사는 거야’란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던 시대에는 연대를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 그런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로 해체된 사회에서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연대 개념의 본격적 시작이었어. 보편적 인류애로 인간 사이 위계와 구분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연대, 연대를 제도화해서 사회적 시민권을 만들고 지탱한 연대, 공유하는 가치 속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연대…. 다양한 연대가 출현해왔지.
B: 그런 연대들의 맥락이란 게 있을 거 아냐. 그런 개념정의를 익히고 따르는 것으로 우리 문제가 해결될까? 지금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사회적 조건에서 어떻게 연대할까를 궁리해야 하는데….
A: 그 시절이 좋았다면서 옛날식으로 재결합하자거나 ‘묻지마 결합’ 같은 건 있을 수 없지. 연대는 자칫하면 적당한 조화와 통합에 호소하는 김빠진 얘기가 되기 쉬워. 불의에 맞선 싸움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게 문제인식을 제쳐둔 통합의 설교야.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여는 연대가 아니라 괜한 향수어린 공동체 이상주의로 빠져들 수도 있어.
B: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으로서의 연대?
A: 나와 주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숙성된 관심과 감정이 낯선 이들과 공유할 가치와 제도에 대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 연대의 정치적 가능성 아닐까? 우린 모여서 놀고 즐기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사안에 대해 뭉칠 필요도 있고,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있어. 연대의 얼굴은 다양한 것 같아.

연대를 억압하는 배제적 연대

A: 우린 먼저 연대에 대한 불신부터 벗어야 할 것 같아.
B: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말이 신뢰의 결여를 젤 드러내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인할 수가 없어서 서글퍼.
A: 사실 그 말은 ‘넌 의지할 데라곤 없는 존재’라는 걸 재확인해 주는 말 같아.
B: 근데 믿을 건 개인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 연대 따윈 시대착오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오히려 자기들끼리 딴딴하게 뭉쳐 있더라구.
A: 그렇지. 어느 시인은 “이미 배불리 먹은 자들이나 먹는 것을 혐오한다”고 했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결속이 센 사람들일수록 약자들이 뭉치는 걸 혐오하고 핍박하지.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무임승차를 조장하고 성실한 개인의 몫을 빼앗아간다고 난리 난리를 쳐.
B: 소위 빽과 연줄을 동원해서 할 것 못할 것 다할 수 있는 힘,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사회적 자본이란 걸 독식하면서, 너희는 연대를 꿈꾸지 말라니. 기댈만한 인적 관계도 사회적 제도도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족벌, 패거리, 파벌, 은밀한 담합 등 그들끼리의 배제적 연대에 맞서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고 문제를 공동으로 개선할 수 있고 불리한 타인에 대한 공감을 포함하는 그런 연대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거든. 그런 연대를 친밀한 관계에서뿐 아니라 공적인 제도로서 만들고 싶은 거거든. 그런 힘을 모아보자고 부르짖으면 개인의 권리가 침투당한다고 호들갑 떠는 건 오히려 단단히 뭉쳐 있는 사람들의 위장이 아닐까?

인권과 연대

A: 그런 면에서 보면 연대도 일종의 권리고 연대의 결여 또는 부족은 인권침해인 것 같아.
B: 인권선언 같은 거 읽어보면, 권리가 엄청 많잖아. 국제적으로 인정된 권리가 60여 개는 된다더라. 그런데 왜 내 삶속에선 권리를 구경하기 힘들지?
A: 권리가 어떤 틀에서 구현되는지에 달린 문제 같아. 형식상으론 각 사람이 똑같이 그 권리들을 개인적으로 가졌잖아?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의 단순한 총합이 사회라고 생각하는 틀에서는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권리의 칼을 뽑아들 거야. 그럼 서로 베고 찌르기만 하다 쓰러질 것 같아.
B: 개인의 권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의 권리로 끝나기만 하는 틀에서는 그렇겠지. 문자론 똑같은 ‘개인’이지만 결코 권력이 똑같지 않은 ‘개인’들의 세계에서 그런 식의 권리 다툼의 승패는 뻔해. 불의한 강자에 의한 약자에 대한 억압을 제거하는 힘이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힘이 연대 아닐까? 그런 연대의 힘을 업지 않고 나 같은 개인 각자가 권리를 자급자족하는 게 가능하겠어?
나는 연대가 권리란 동전을 유통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해. 권리라는 동전을 개별적으로 아무리 쌓아놓아도 그걸로 타인과 교섭하고 합의하고 뭔가를 구축하는 과정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잖아.
A: 권리가 끝없는 대결이 아니라 상호보장 되기 위한 조건이자 환경이 연대라고 할 수 있겠네.
B: 근데 세계인권선언에 보면 ‘연대’란 말은 안 나오던데.
A: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문에서 암시돼 있고, 제28조에 있는 권리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체제 및 국제체제’란 말에 담겨 있어. 그리고 본문에 있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등이 연대를 사회적 시민권으로 다룬 권리들이야. 또 연대는 ‘권리’와 ‘의무’를 함께 담은 말로도 생각할 수 있어.
B: 권리와 의무가 동전의 양면 같단 말이야?
A: 응. 법에서 다루는 채권·채무 관계를 집단적 차원에서 책임관계로 고려하게 만든 것이 연대야. 법적 개념을 넘어 정치적 개념이 되면서 연대는 새로운 유형의 제도 구성원리가 되었어.
B: 난 이왕이면 채권이 좋은데, 채무는 끔찍해.
A: 사회로부터 개인이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느냐 개인이 사회에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느냐, 권리냐 의무냐의 차이인데, 사실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공공서비스나 사회적 인프라의 혜택을 많이 봤다고 할 수 있어. 그럴 경우 사회로부터 많은 몫을 받은 것이고 그만큼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 아닐까? 또 사회적 권리의 경우를 생각해봐. 사회보장과 관련된 세금을 납부해서 연대에 기여할 의무가 있고, 내가 노동능력의 상실로 소위 기여가 없다 할지라도 사회의 성원으로서 사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어떤 경우건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개인의 업적을 따지거나 가족관계 등 기댈만한 인적관계에 내맡기지 않고 사회가 집합적으로 책임을 지는 관계를 만드는 거야.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필요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거지.
B: 내가 채권자로도 채무자로도 등장할 수 있는 관계네. 나에겐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고.
A: 가령 돈에 쪼들릴 때마다 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한테 백 원씩만 줬으면 좋겠다.’ 집합적으로 곤궁을 해결하는 연대의 제도는 대대적인 상부상조를 가능하게 해. 게다가 내가 직접 백 원을 구걸 또는 호소하는 수치를 느끼지 않고, 익명의 상대들로부터 받은 세금으로 이뤄진다는 점이 좋아. 반대로 개인들이 자기가 받는 혜택은 많아지고 튼튼해질 것을 요구하지만, 지는 부담은 줄이기를 요구하는 이중성이 있어. 차가운 관료제가 대면관계에서 맛볼 수 있는 끈끈함을 주기는 좀 어렵지.
B: 친밀한 연대와 제도로서의 연대에는 늘 긴장감이 있는 거지. 개인의 자유와 집합적 책임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둘 간의 적절한 조합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친밀한 연대와 제도로서의 연대 둘 간의 적절한 긴장과 조합이 필요할 것 같아.

연대의 지구적 틀짜기

A: 최근 연대를 중요하게 다루는 사람들은 연대의 틀을 지구적인 것으로 상승시켜야 한다고들 해.
B: 가까운 공간에서도 내 자리가 불안하고 관계 맺기가 어려운데 국제적 차원의 연대라…. 그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맨날 비행기 타고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나 국제기구 종사자가 아닌 바에야….
A: 틀을 단지 키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틀의 성격을 바꾼다는 거야. 한 국가 차원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려면 틀을 바꿔야지, 헌 틀에서 작업을 하면 당면한 문제에 적용이 안 될 거야. 가령 아까 말한 사회적 시민권 같은 건 한 국가틀 내에서만 가능하잖아. 국경을 넘어서면 권리의 문제가 아닌 빈곤구제로 바뀌어버려. 이걸 조정하는 틀을 만들자는 거야.
B: 나는 여기 묶여 있고, 중요한 결정의 힘은 국경을 맘대로 넘나드는데 내가 무슨 틀을 바꿀 수 있는 거지?
A: 넘나드는 것들, 사람이건 상품이건 기본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틀을 맞추자는 거야.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책임회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틀을 만들자는 거지. 가령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지구 어디에서나 경제활동으로 이익을 얻는 자라면 누구든 그 활동의 결과로 환경과 인간에게 미친 손해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는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야. 그들이 예로 드는 유럽의 기준 중에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 상품을 하자있는 상품으로 정의하고, 이 하자로 인하여 사람이나 재산에 가해진 손해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계약관계가 있건 없건 생산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어.
B: 그런 식으로 초국적 기업 등에 책임을 묻는 일 중요하지. 근데 듣고 보니 내가 지구적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져야 할 책임을 따져볼 수도 있을 것 같아.
A: 프랑스 혁명의 대표 구호가 자유, 평등, 우애인 건 잘 알려져 있지?
B: 그렇지. 그 ‘우애’가 오늘날 ‘연대’로 전개돼온 거고.
A: ‘우애’를 강조하면서 “프랑스에서 유일한 타인은 나쁜 시민 뿐”이란 선언이 있었대.
B: ‘나쁜 시민’이라고? 어떤 이가 나쁜 시민인데?
A: 공적인 일에 관심 갖지 않는 시민을 가리켜 나쁜 시민이라 했대.
B: 나는 나쁜 친구도 나쁜 시민도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삶은 너무 피곤해. 아, 연대의 고민은 끝날 일이 없겠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