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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다시 진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던, 탈출을 하고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죽음의 진실

[편집인 주]

1월 20일, 어느덧 날짜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을 남긴 용산참사를 우리의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다. 국가의 폭력으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죽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6년이 흘렀다. 억울하게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구속 철거민들이 감옥에서 보낸 서러운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책임을 묻기 위한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그래서 밝혀야 할 진실의 과제가 무엇인지 5회에 걸쳐 짚어줄 것이다.

용산참사로 6명의 생명을 잃었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급박하게 진압작전은 결정되었고 인명과 안전보다는 신속한 진압이 우선이었다. 신속한 진압을 결정한 명분은 철거민들이 하루종일 화염병을 던져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위해와 교통흐름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경찰특공대를 투입하기 위해 철거민들은 ‘도심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엄정한 법집행, 공공의 안녕을 위한 법질서를 위해 철거민들의 절박한 호소는 범죄가 되었다.

나는 당시 진상조사단에 결합해 19일의 상황을 조사했다. 철거민들이 정말 언론과 경찰이 주장하는 ‘도심 테러’를 벌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주변 상인과 주민들을 찾아가 19일의 기억을 들려달라고 했다. 대체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터뷰의 결과는 경찰의 주장과 너무 달랐다. 망루를 지을 때 용역들과 대치하면서 투척행위는 있었지만 제한적이었고, 오후부터는 그마저도 없었다. 주민들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생활을 할 정도였고 오히려 오전 내내 진행된 경찰의 살수로 망루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할 정도였다. 나는 이 소중한 사실이 철거민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혀 주리라 믿었다. 기자회견을 하고 언론에 기사가 실리면 상황이 변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정부와 공권력은 사실을 철저히 무시했고 경찰특공대의 진압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삶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들은 함께 망루에 올랐던 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이 되었다.

2009년 1월 20일, 불에 타 쓰러진 망루 뒤로 높은 빌딩들이 군림하듯 서 있었다. 뿌연 회색 대기 속에 우뚝 솟은 빌딩들이 망루를 짓밟은 느낌이었다. 번영의 상징으로 고층빌딩을 내세우며 부를 과시하는 도시재개발은 야트막이 삶을 꾸려가던 사람들을 추방했다. 약탈적인 재개발에 공조한 공권력은 잔혹하게 생명을 앗아갔고 죽은 이들을 모독했다. 망루에 오르면서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기도 전에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이제는 살아 돌아올 수는 없지만 전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 이 도시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싶었던 삶의 권리를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용산참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고, 그들의 죽음의 과정을 밝혀야 할 이유다.

불타는 망루에서 탈출했던 이성수, 윤용헌은 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까

1차 화재를 피해 망루 밖으로 나왔던 경찰특공대는 명령에 의해 7시 18분경 망루 안으로 다시 진입했다. 곧 이어 7시 20분경 2차 화재가 발생하였고, 7시 25분경 불길은 망루 전체를 뒤덮었다. 그 과정에서 망루 안에 있던 농성 철거민들은 각자 판단에 따라 망루의 창을 통해 뛰어 내렸다. 망루 농성 생존자인 지석준 씨는 윤용헌, 이성수와 함께 망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석준 씨는 윤용헌, 지석준, 이성수 순으로 망루에서 뛰어내렸고 이성수 씨가 지석준 씨의 다리 위로 떨어져 자신이 골절상으로 입은 반면 윤용헌 씨와 이성수 씨는 뛰어내린 후에도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윤용헌 씨는 망루에서 뛰어내린 후 쓰러져 있는 자신을 흔들었으며, 이성수 씨는 불타는 망루에서 멀어지도록 자신을 부축했다고 했다. 그러나, 윤용헌, 이성수씨는 불에 타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망루에서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윤용헌 씨가 ‘성우야(지석준의 아들 이름) 정신 차려, 여기 있으면 죽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윤용헌 씨는 남일당 빌딩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윤용헌, 이성수 씨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돌아가셨다면 골절상으로 돌아가셔야지, 왜 불타서 돌아가셨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석준 씨의 진술)

지석준 씨의 일관된 진술은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당시 현장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과도 일치했다. 동일 시간에 촬영된 사진과 영상을 통해 망루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이동경로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망루에서 탈출한 사람들 중 윤용헌, 이성수 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본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유가족과 지석준 씨는 MBC 촬영 영상 원본을 확인한 결과 지석준 씨와 옥상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이 이성수 씨임을 확인했다.

불타는 망루를 피해 탈출한 생존자, 윤용헌, 이성수 씨는 왜 망루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일까? 그들이 망루로 다시 되들어갈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당시 MBC 촬영영상에 의하면 7시 23분~7시 26분 사이에 이성수 씨는 지석준 씨와 옥상 난간에 함께 있는 것이 확인된다. 7시 25분경 망루는 주차장 쪽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망루 안으로 이들이 다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상황인가? 만약 이들이 다른 농성자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망루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면, 망루 전체가 화재로 번지기 이전에 옥상은 경찰들이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었는데, 옥상에 있던 경찰들은 그들을 왜 막지 않고 다시 망루로 들어가게 두었을까?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경찰특공대 김남훈 경사는 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했을까

경찰특공대원들은 망루에서 2차 화재가 나기 직전에 모두 철수했지만 김남훈 경사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화재발생 이후 무전내용 상으로도 제대원에 대한 정확한 인원 파악은 되지 않았다. 김남훈 경사의 사망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친의 인터뷰를 통해 12시경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남훈 경사가 어떤 상황에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당시 진압상황에 대한 증언으로 죽음을 피하기 힘든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김남훈 경사가 속한 경찰특공대 1제대는 컨테이너를 타고 망루에 진입해 농성자들을 검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1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특공대원들은 2차 망루 진입 당시, 진압의 위험성과 구토, 심지어는 환각 증세까지 느낄 정도로 유증기가 꽉 차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철거민 변호인들은 특공대원들에게 “위험하다는 생각이나 무전으로 보고할 생각은 안했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특공대는 최대한 빠른 진압이 목적이라 그런 생각은 안했다”고 말했다. 안전하게 농성자들을 해산시키기보다는 신속한 진압이 더 우선이었다는 것이다.

1제대 소속 A 대원: 1차 진입 때는 시너 냄새가 별로 안 났으나 2차 진입 땐 환각상태였다. 정신이 취한 것처럼 혼미해져서 계단을 잡고 올라갔다. 불 회오리가 저한테 덮치는데도 시너에 중독돼서 정신이 없었다. 밀폐된 공간에 시너가 그렇게 될지 몰랐다. 마약을 하면 그런 느낌이 나겠다고 느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깨보니 살아 있었다.(이 대원은 좁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1제대 소속 B 대원: 2차 진입 때 시너냄새가 출입문과 계단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많이 났다. 약간 몽롱해지는 느낌이 났고 인화성이라 느꼈다. 이상하다 1차와 다르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위험을 느꼈지만 보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 상황에서 퇴각하자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시 진압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증언들이다. 특공대와 지휘본부의 무전망이 다르다는 이유로 진압상황과 망루 내부의 위험성에 대해 확인하지 않은 지휘부는 신속검거만을 종용했다. 특히 2차 진입에는 소화장비도 거의 없었다. 1차 진입이 끝나고 재진입을 준비하는 동안 8~10여 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소방대책은 특별히 세우지 않았다. 1제대 한 대원은 “망루 모서리의 함석을 뜯다가 2차 진입을 하라고 해서 소화기도 다 떨어지고 소방호스 지원도 없이 방패만 들고 올라갔다”고 말했다. 김수정 전 서울지방경찰청 차장 등 경찰 지휘부는 특공대 투입의 정당성으로 기동대보다는 특공대가 신속하고 안전하게 진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재판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특공대원들과 경찰 지휘부의 진술은 모두 조급함으로 안전을 외면한 실패한 작전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실패한 작전의 대가는 참혹했다.

6명의 사망원인은 화재가 아니라 진압과정에 있다

망루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5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오직 검찰에 의해 증거 하나 없이 농성자들의 화염병 때문에 화재가 났다는 추정만이 주장되었고 법원은 그대로 결론을 냈을 뿐이다.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는가’가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압작전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이다. 진압과정이 어떠했는지, 망루 안의 경찰과 농성자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왜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는지가 사망의 원인, 참사의 진실이다.

망루 안에서 화재로 사망했다고 하는 6명의 죽음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여전히 어떻게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사망한 5인의 망루 농성 철거민들 중 고 윤용헌씨와 고 이성수씨의 죽음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탈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던 이들이 왜 연행되거나 구조되지 않고 시신으로 발견되었는가. 그리고 일반인이 아닌 훈련된 경찰특공대인 고 김남훈 경사는 왜 불이 난 망루를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했을까. 경찰특공대조차 피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떠했을까. 경찰이 전원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동료의 생존확인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농성자들의 안전도 돌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할 수 있다.

과연 이들이 경찰의 주장대로 극렬한 저항과 시위를 했기 때문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일까? 아니면 미처 화마를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인가? 당시 진압과정을 밝히는 것이 6명의 사망자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길이다.

*이 글은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공동 게재됩니다.
덧붙임

랑희 님은 인권운동공간‘활’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