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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다시 진실] 용산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들

[편집인 주]

1월 20일, 어느덧 날짜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을 남긴 용산참사를 우리의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다. 국가의 폭력으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죽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6년이 흘렀다. 억울하게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구속 철거민들이 감옥에서 보낸 서러운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책임을 묻기 위한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그래서 밝혀야 할 진실의 과제가 무엇인지 5회에 걸쳐 짚어줄 것이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가 발생한 직후 사회적 관심은 화재의 원인에 쏠려 있었다. 참사당일 경찰서로 연행된 철거민들을 접견하고 돌아와 밤새 칼라TV 영상을 돌려봤다. 하지만 화재의 원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검찰은 용산참사의 원인을 철거민들의 화염병으로 결론짓고 철거민들만 기소를 하여 재판이 시작되었다. 용산참사 변호인단으로 참여해서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경찰 채증영상을 반복해서 돌려봤다. 역시나 화재의 원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1차 화재가 발생했던 순간

하지만 사고 당일 화재가 두 번 일어났던 것은 쉽사리 목격할 수 있었다. 사고 당일 7시 5분경 옥상 망루 3층과 4층에서 1차 화재가 발생했다. 칼라TV영상에서도, 경찰 채증영상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옥상 망루 모서리 틈새로 1차 화재 불길이 빠르게 번져가는 장면이 목격이 되고, 그 시각 경찰 통신망으로도 “망루 안에 불이 많이 나서 끄고 있어요. 망루 안에 시위대들 안전하게 체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지시가 나온다. 그러나 진압은 중단되지 않았고, 15분 후인 7시 20분경 망루를 집어삼킨 화재가 발생했다.

용산참사가 발생하고 6년이 흘렀다. 각자에게 용산참사는 다른 의미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용산참사를 생각하면, 1차 화재가 발생했던 이 순간이 떠오른다. 이때 진압을 중단하고 구조조치를 취했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 결정적인 순간이다.

안전대책은 왜 계획대로 이행되지 않았나

서울지방경찰청은 당시 현장에 상당량의 인화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경찰의 진압계획서를 보면, “사전조치로 소방차 최대한 확보, 안전사고 대비 구급차 등 의료장비 대기, 동원경력에 대한 안전진압 등 교양철저, 투신대비 건물 하단에 매트리스·그물망 등 설치, 작전시 유의사항으로서 작전 개시전 안전매트·소방장비 등 장비확보, 안전대책 강구”등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진압과정은 이러한 안전계획이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당시 소방방재청의 국회보고에 따르면 용산참사가 발생하기 전 진압현장에 출동한 소방차는 단 2대 뿐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현장책임자였던 서울경찰청 경비부장은 “용산서장이 모두 준비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알았다”고 하고, 당시 용산경찰서장은 “실제로 소방차가 얼마나 왔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하는 등 안전대책 강구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한편 당시 경찰지휘부는 현장의 인화물질이나 위험물의 현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정작 진압현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원들은 위험물의 종류나 수량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지휘부는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특공대원들에게 안전조치를 위한 제대로 된 교양실시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진압만을 명령했다. 경찰지휘부는 옥상 위의 망루라는 고립된 공간에 상당량의 인화물질이 있었고,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인한 화재의 위험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진압계획에서도 수차례 “안전대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세운 진압계획의 안전조치와 경찰청 지침에서 정하고 있는 최소한의 사전조치도 준수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진압을 명령했다. 경찰지휘부 중 단 한명이라도 현장의 안전대책에 대한 점검을 하고 진압을 중단했더라면. 이런 대형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두 번째 결정적인 순간이다.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경찰진압을 왜 이렇게 서둘렀나

경찰은 철거민들이 농성을 시작한지 단 하루 만에 진압을 결정했다. 경찰 자신들이 정한 안전수칙도 지키지 아니한 채 이렇게 서둘러 진압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검찰과 재판부는 화재의 원인에만 집착한 나머지 경찰의 진압 결정 및 그 과정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용산참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화재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 철거민들이 망루 농성을 하게 된 배경, 농성 시작 단 하루 만에 진압을 결정한 경찰지휘부의 결정이 타당했는가에 맞춰졌어야 했다. 당시 용산4구역 개발현장에서의 철거용역업체의 폭력 때문에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당시 용산구청이나 경찰은 용역업체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수수방관 하고, 철거민들을 “때쟁이”로 취급했다.

최근 한겨레신문이 용산에서 쫓겨난 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용산철거민 23가구를 전수 조사했다. 당시 용산4구역의 철거민들은 시계방, 호프집, 책·비디오대여점, 식당, 피시방을 운영하던 자영업자들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이들 중 대부분이 불안정한 노동형태로 일하고 있거나 아예 직장조차 없었다. 자가에서 살던 사람들은 전세나 월세로, 임대주택으로 몇 계단씩 내려않았고, 가족과 함께 살던 이들 가운데는 뿔뿔이 흩어져 홀로 사는 이도 있다. 이들의 현재가, 이들이 2009년 당시 왜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재개발·용역업체의 불법과 폭력에는 수수방관하던 국가가, 생존을 위해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에게는 단 몇 시간도 용납하지 않았다. 2009년 방송된 MBC PD수첩을 봐도, 경찰의 진압 개시 전 농성현장은 평온한 상태였다. 당시 농성현장에는 다른 재개발 지역의 철거민들도 연대차원에서 결합하고 있었다. 이들은 살려고 망루에 오른 것이지 죽으려고 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을 “도심의 테러리스트”라고 상정하고 단 하루 만에 진압을 결정했다. 경찰이 진압을 결정하기 전에 안전수칙에 따라 단 며칠이라도 철거민들과 대화를 시도하였다면. 용산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세 번째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는 이 없다

이처럼 용산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들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들에 대하여, 지금까지 그 누구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고, 제대로 된 진상조사도 없었다. 경찰의 부실한 안전대책, 위험한 진압과정, 경찰특공대 조기 투입의 경위에 대하여 더 늦기 전에 진상조사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다음에 결정적인 순간들을 또 다시 직면했을 때, 참사를 막을 수 없다.

*이 글은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공동 게재됩니다.
덧붙임

장서연 님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