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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름

9월 27일 서울대 사회과학대 학생회가 반성폭력학생회칙을 개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른바 ‘서울대 담배녀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이 사건은 남학생이 줄담배를 피며 이별을 통보하는 상황에 모멸감을 느낀 여학생이 이 상황을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남학생이 속한 단위에 공식적인 문제해결을 바라는 요청서를 보내면서 시작되었고, 해당 단과대의 학생회장이 자진 사퇴하면서 공론화된 바 있다.

사건이 재조명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당시에 느꼈던 복잡한 심경이 다시 일었다. 먼저, 담배를 피우며 고압적인 태도로 이별을 통보하는 남자친구의 태도에 무척 기분이 상했다는 당사자의 기분에 동의와 지지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 불쾌감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사건을 ‘성폭력’이라고 명명하고 제도적으로 해결할 것을 선택한 당사자의 판단이 그 방식과 절차와 전략 상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물음표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줄담배=성폭력?’ 이라는 단순화된 프레임으로 여론이 형성되었지만, 사실 문제는 담배 그 자체는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내재되어있던, 젠더권력에 기반한 폭력이 이별통보라는 상황에서 표출되었고 당사자는 그 불편함에 ‘성폭력’이라는 익숙한 이름을 붙였다.

여성폭력에 반대하는 포스터. <사진 출처>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 여성폭력에 반대하는 포스터. <사진 출처>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수면 아래로 묻혀버리곤 했었던 젠더권력의 문제를 ‘성폭력’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문제시하고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해 온 것은 반성폭력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서 겪는 다양한 억압과 불쾌의 감정들이 성폭력이라는 개념으로 넓게 해석되면서, 일상적인 폭력에 문제제기할 수 있는 언어는 오히려 사라지고 있다. “문제제기 하려면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피해자만 문제제기할 수 있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것”(전희경)이다.

일상적인 폭력에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성폭력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당사자와 지지자를 포함해 사건 해결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젠더불평등한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할 것 같지만, 사실상 그렇지도 않다. ‘누구와 함께 해결할 것인가’, ‘어떤 전략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함께 하고, 중요한 판단을 내리는 데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지지자가 당사자와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대학 내 여성주의 활동이나 조직화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흐름에서 당사자의 상태와 감정을 공감, 지지해 줄 세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당사자가 주체로서 해당 사건에서 어떤 지점이 문제였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피해자가 되지 않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겐, ‘성폭력 개념 확장’이 아니라 ‘성폭력 이외의 개념 확장’, ‘다양한 고통을 경청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귀의 확장’, ‘다양한 성별권력과 일상의 애매한 폭력들을 문제제기하는 여성주의 세력의 확장’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 전희경, <공동체 성폭력 ’이후‘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다>, p.18-19

성폭력 규정의 축소가 답인가?

새롭게 개정된 반성폭력 회칙을 살펴보자면, 성폭력을 ‘성적이거나 성차에 기반을 둔 행위’로 규정했던 이전의 조항을 ‘상대의 동의를 받지 않은 성적 언동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로 축소했으며, 성폭력은 ‘단순히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이나 성별 권력관계에 기반한 행동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공동체의 합의를 거쳐 사건이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되기 전에는 ‘가해자’가 아닌 ‘가해피의자’로 호명하는 등 이전에는 없었던 가해자 인권보호의 조항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 사건을 겪으며 느꼈을 학생사회의 혼란이 학칙 개정이라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일상화되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제도적으로 세밀해질수록 오히려 중요한 부분을 놓쳐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문제제기가 있을 경우, 그것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합의를 통해 판단하고 성폭력이면 절차에 맞게 진행하고 아닌 경우 그냥 폐기해버리는 식의 제도화된 접근으로는 당사자의 치유와 사회의 변화라는 중요한 두 가지 가치 중 어느 것도 진정으로 이루어내기 어렵다.

성폭력 여부를 규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 회칙 개정은 일상적인 폭력에 대응하는 공동체의 역할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성폭력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무엇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는 것은 공동체의 선 역할이라고 할 수 없다. 학생 사회 내부에서 사건이 성폭력이다/아니다를 판단하고 합의하는 것보다, 당사자가 왜 그 상황을 성폭력이라고 칭했는지 당사자의 해석에 대한 지지기반 위에서 논의의 장이 시작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당사자의 목소리는 공중으로 사라져버렸고, 언론의 프레임과 학칙 개정만 남게 된 결과에 씁쓸함이 남는다.
덧붙임

케이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