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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광고 받아도 될까요, 라구요?

‘민중의 소리’ 기업 광고 유치에 대한 단상

하필이면 삼성 광고를 받겠다는데, 긴 할 말이 필요할까 싶었습니다.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삼성은 드러내 놓고 소비하기 부끄러운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진보라 할 것 없이도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삼성 냉장고’ 조차 쪽팔린 요즘이니까요. 그러니 민중언론이라 자처하는 곳에서 그 삼성을 꼬집어 광고를 받겠다는데, 뭐 달리 할 말이 필요 있겠나 싶었습니다. “맛 갔군”하면 끝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다시 몇 번 곱씹어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그냥 상대 안하면 그만이지 하고 술안주 뒷이야기 몇 번으로 관계를 뚝 끊어버리기에 아쉬운 이유가 몇 가지 되더군요.

입장의 차이, 불공평한가

우선은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한겨레, 경향에 광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삼성과 현대와 SK가 문제라고 했던 그간의 논리도 있는데 말입니다. 한편에서는 달라고 하고, 한편에서는 받지 말라고 하면 요건 얼마나 불공평한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불공평함이 하나의 이유이긴 했습니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까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진보매체라 불리는 이들 매체와 그 밖의 ‘민중의 소리’, ‘민중언론 참세상’을 달리 본 것은 사실입니다. 그 달리 봄이 불공평한 입장의 차이를 낳았습니다.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을 자임하는 ‘민중의 소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협한’ 언론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한겨레와 같은 매체들이 전적으로 민중의 편일 수 없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될 만한 기사꺼리, 될 만한 사건이 아니면 무조건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하기 어려운 그들에 비해, 민중의 소리 등은 될 만하지 않아도 일단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주는, 별 볼일 없는 나와 같은 편이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주관적인 이야기니 나 혼자 착각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그래서 나는 ‘민중의 소리’가 요청하면 원고료 따위 거래 없이 흔쾌히 원고를 쓰곤 했습니다. 그건 서로 간에 맺은 암묵적 동의 같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민중의 소리’는 더 넒은 민중의 바다로 가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배신감 드는 건 당연합니다. 더 넓은 민중의 바다로 가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기업 돈을 받겠다고 하는 순간, 운동가인 내가 빠질 엄청난 모순 속으로 ‘민중의 소리’가 풍덩 빠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우리는 언론이지, 운동을 했던 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민중의 소리’가 서 있던 자리가 일반 언론이 말하던 위치에서 우왕좌왕 하던 그 ‘언론’이었던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광고국장으로부터 온 독자에게 묻는 편지의 내용은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더욱 많은 민중의 소리 기자들을 키우고, 더욱 넓고 깊은 취재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기자들의 활동비도 필요하겠지만 각종 취재와 운영을 위한 유지비도 상당한 규모가 됐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동안 진보매체 기자들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활동비 수준, 또는 그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러한 임금을 감당하는 이유는 우리 같은 활동가들과 비슷한 사명감도 있었을 테고, 경력을 쌓기 위한 희생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광고국장이 그런 현실을 감안해서, 기자들에게 활동비가 아닌 실질적 임금을 주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말했다면 훨씬 인간적인 공감을 얻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기자들의 활동비… 이런 활동비라는 명칭은 저임금 상태를 자신의 신념으로 저당 잡는 그야말로 활동가들한테나 쓸 말입니다. 기자들의 저임금 상태가 기자들의 동의지반 위에 서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게 맞다면 여전히 ‘민중의 소리’는 활동이라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 민중의 매체여야겠지요. 각설하고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몸을 불리겠다는 변명과 논리는 역시나 자본주의 체제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살자는 비명으로만 들립니다. 또는 이중적인 잣대.

실망, 나는 공정하게 대하겠다

또 하나의 실망. 삼성 광고를 받으면서 삼성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그 배포는 어디서 나올까요? 삼성 광고를 싣고 몸집을 불려서 그렇게 기대하는 규모와 장비를 유지하게 되고, 시나브로 그 규모에 익숙해지는 순간, “이 보도를 내면 광고를 끊겠다”는 그들의 협박에 “민중의 소리는 협박한 사실을 보도해 버릴 언론이니까요.”라고 답했던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을 겁니다. 한겨레신문은, 경향신문은 민중의 소리보다 기자정신이 모자라서 정의감이 없어서 그런 협박에 굴복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도 그런 규모이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먹여살려야할 가족이 늘어난 그들에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규모는 늘리고 싶은데, 협박에는 당당할 수 있다고요? 참 천진난만 하십니다. 그런 논리를 다른 매체의 동료들에게 얘기해 보세요. 뭐라 할지, 얼굴이 붉어집니다.

결론은 첫 반응과 똑 같습니다. “맛 갔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민중의 소리’를 절독하겠다느니, 원고 청탁을 무조건 거절하겠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왜냐면, 삼성에 광고를 받고 현대에 광고를 받더라도 한겨레를 구독하고 오마이뉴스에 기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공정하게 ‘민중의 소리’를 대할 생각입니다.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 ‘민중의 소리’는 예전의 ‘민중의 소리’처럼 애매모호하면 안 될 것입니다. 장비와 규모를 늘리기 전에 모든 기자들과 일꾼들에게 활동비가 아닌 임금을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민중의 소리’ 기자들은 활동가가 아니라 언론 노동자입니다.

덧붙여. 기업 돈을 받겠다는 그 포부를 꼭 “삼성 광고 받아도 될까요?”라고 한 것에는 다시 한 번 심각한 유감을 표현합니다. 대표하고 싶었던 그 단어는 존재만으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 있습니다. 이를 테면 반미주의자들 앞에서 “백악관의 광고 받아도 될까요?”라고 한번 해 보십시오. 그 단어만으로 백만의 비판자들 앞에 서야 했을 겁니다. 이미 그 단어로 ‘민중의 소리’는 시험단계에서 맛이 갔던 겁니다.
덧붙임

박진 님은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