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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유혹] 이명박의 실용주의와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의 알맹이는 어디에

<편집자주>

하늘거리며 사람들의 머리에 부딪히는 벚꽃의 향연은 자연을 찾게 한다. 게다가 현 정부의 막무가내식 정책과 경제위기는 세상보다는 자연으로 파고들고픈 마음을 더욱 부추기는 요즘이다. 삶의 과거와 현재가 담긴 책 하나에 빠져든다면 자연만큼은 아니어도, 아니 자연과는 다른 즐거움을 얻지 않을까. 현실의 갑갑함을 이해하고 돌파할 힘을 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시 한편 소설 한편에 뜨거워진 마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번 호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책의유혹]은 인권활동가들이 최근 읽은 책을 소개하고 느낌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이다. 새로 나온 책이건 아니건 간에 인권활동가들이 책의 향기를 여기저기 날려 책 내음, 사람 내음이 읽는 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최근 이명박은 “북한은 미사일을 쏘지만, 우리는 나무를 심는다.”는 발언을 했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이명박 대통령은 철학을 전공했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명박의 발언은 스피노자의 경구만큼 철학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의 발언이 심오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는 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실용주의라는 단어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철학적 기반인 ‘프래그머티즘’에서 비롯된 용어다. 프래그머티즘은 순수한 진리를 탐구하는 기존의 플라톤적 철학을 거부하고 지식의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철학적 태도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국가운영의 전면에 내세운 실용주의는 경제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적인 처세술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가 실용주의라는 단어를 차용한 것이라면 몰라도 국정철학의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실용주의의 왜곡이라는 문제의 심각성은 2002년 출간된 김동식의 저서「프래그머티즘」을 보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퍼스, 제임스, 듀이, 로티 등 프래그머티즘의 주요 사상가들을 체계적으로 언급하면서 프래그머티즘의 사상적 배경, 의미, 특징을 서술하고, 나아가 프래그머티즘이 현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밝힌다.


실용주의의 진짜 의미

프래그머티즘은 2차 대전 당시 파시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쇠퇴한다. 프래그머티즘의 쇠퇴 이후 미국의 주류철학은 논증을 중시하는 분석철학이었는데 로티는 이를 거부하며 네오프래그머티즘(신실용주의)을 내세운다. 책의 논의 중 흥미로운 부분은 이 리처드 로티에 대한 논의이다.

로티에 따르면 철학적 논의가 점점 전문화 세분화되어 폐쇄성을 띠며 사람의 삶의 실질적인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신의 존재유무, 절대적 진리의 존재유무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없다고 해서 모든 게 다 가능하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 도덕은 실천의 문제이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인가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인 실천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입증되어야 한다. 그는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잔인성의 감소, 자유의 확대 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도덕적 지향점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네오프래그머티즘에서 정치, 도덕은 절대선의 추구가 아닌 도덕적 지향점을 공유하는 사람들간의 연대의식이 확장하는 것이다.

즉, 프래그머티즘은 사람들의 사회적 실천과 합의, 연대의식을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민주주의의 공간을 옹호한다. 또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진보적이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이라는 기준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어떠한 삶이든 나름의 의미를 갖게 하는 여유를 준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자유, 연대, 창조는 사라진 이명박식 실용주의

반면, 이명박 정권은 촛불시민들을 구속하고, 정권에 비판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는 억압적 공간을 지향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절대적 가치를 밀어붙이고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영어몰입교육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이라는 기준을 강요함으로써 그 기준에서 벗어난 가치관을 가진 삶을 사회에서 배제하려한다. 이러한 특징들과 분명 프래그머티즘의 특징과는 상이하다. 결국 이명박의 실용주의는 모순적이거나 처세술 정도의 경박함을 지닌다.

실용주의라면 경제적 가치가 최우선이다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한다. 실용주의에서 지식이란 자본주의적 현실에 순응해서 돈벌이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한계에 도전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창조적인 지식을 말한다. 결국 실용주의자가 지향하는 사회는 황금만능주의 사회, 경제지상주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 각자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추구할 자유가 보장되는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이다. 로티 등의 이러한 실용주의는 ‘실용주의’ 정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유효한 이정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얼마나 알맹이가 없는지 더 알기 위해서는 다음의 도서를 참고해도 좋다. ‘프래그머티즘’(김동식·아카넷) 이전에 쉬운 입문서로는 ‘듀이&로티’(김동식·김영사), ‘실용주의’(이유선·살림)가 있다. 실용주의의 대세인 로티를 공부하려면 입문서로 ‘리처드 로티’(이유선·이룸), 전공서적으로 ‘실용주의의 결과’(김동식·민음사)를 참고하면 되겠다. 한권씩 읽다보면 이명박 정부 뇌세포의 경박함이 보일 것이다.
덧붙임

조은님은 전쟁없는 세상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