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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페미니즘, 길을 묻다

[페미니즘, 길을 묻다 (2)] 신자유주의가 그들을 페미니스트로 만드는가

빈곤계급의 젠더, 섹슈얼리티 깨뜨리기

지수는 어디로 갔을까?

지수와 연락이 되지 않은 지 6개월 째. 마음을 다해 정말로 그녀가 보고 싶어 죽겠다. ‘선생님, 그것도 모르세요.’ 하면서 재잘재잘 대다가 담배 한 대를 집어 들고 “답답하죠. 나이는 먹고. 이 에스프레스보다 내 인생이 더 쓴 거 같애.”라고 말 했던 청주에서의 만남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

경제위기, 전망을 상실한 가족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신빈곤층’(MB에 의해 금지어가 된)의 십대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 하면서 내가 가장 뚜렷하게 느낀 사실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가족이 바뀌었다!’ 외환위기 전, 빈곤층 십대 여성들의 삶과 문화를 연구했던 시절에 그들의 가족은 가출한 딸을 찾고 미아리에서 일하는 딸을 잡아다가 집에 가두었다. 하지만 이제 가족은 가출한 딸을 찾지 않는다. 자신의 딸 문제를 상담하려고 전화한 담임선생님에게 ‘왜 그런 걸 나한테 전화 하냐?’며 되묻는다. 우리 이제 각자 알아서 잘 살자며, 딸을 보호시설에 맡기고 엄마를 찾지 말라고 당부한다. 시장에서 팔다 남은 시래기라도 끌어 모아 아이들을 끓여 먹이던 옛날 가난한 가족의 풍경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가족들이 ‘서로를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전망을 상상하기가 너무 어려워진 가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떠나고 있다.

빈곤층 십대들의 급진적 페미니즘?

가족을 떠나며 엄마가 딸들에게 하는 말은 ‘남자 믿다가 망하지 말고 네 앞가림은 네가 해라.’ 이다. 너무나 페미니스트적이지 않은가? 더 놀라운 사실은 신빈곤층 십대 여성들은 웬만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능가하는 ‘진보적’ 마인드를 지녔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에 의해 버림받고 서서히 망해가는 남성들을 집에서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에 남성 혹은 남성성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여성으로서 자신을 승인할 수 있는 권위를 남성으로부터 찾던 그녀들이 이제 다른 것으로 옮기고 있다. 남자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담론은 이들 앞에서 생명력을 잃는다. 적어도 이들은 ‘자본’에게 잘 보이고 이쁨 받고 싶어 하지 ‘남성’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여성들을 ‘여성적’이도록 묶어 두었던 권력 중 하나는 자본과 남성 사이의 공고한 공모적 관계였다. 자본은 노동력이 재생산되도록 여성-가정을 이용했고, 남성은 대표 임금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자본은 자신이 필요한 단위를 가족에서 개인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이 와중에 남성들은 자본으로부터 버림받고, 여성들은 집을 나가고, 딸들은 남성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으려 하는 기이한 ‘젠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역시 집을 나가고 있다. 신빈곤층 딸들을 여성주의적으로 만든 건 페미니즘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자본과 그에 의해 버림받은 남성들의 현실이다.

3월8일 청계광장에서 세계여성의날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 3월8일 청계광장에서 세계여성의날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적 다윈주의와 섹슈얼리티

느슨해진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 딸들은 한 편에서는 남자와 상관없이 아이를 낳아서 자신의 아이로 키우며 멋지게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사는 것은 살리고 죽는 건 내버려두는’ 새로운 사회적 다윈주의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정말 ‘가진 것 쥐뿔 도 없는’ 십대 여성들이 공부-졸업-취직을 거치며 승부를 보는 건 ‘꼴 보수가 한겨레의 애독자가 되는 일’보다 더 어렵다. 게다가 그녀들은 그 긴 시간을 유예해서 손에 쥐어지는 건 결국 ‘88만원’ 언니나 오빠들의 뒷자리라는 것도 훤히 꿰뚫고 있다.

대학 졸업 뒤 외모가 안 돼서 취직 못하고 단식원에 살 빼러 들어와 있는 언니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지수는 ‘대학 나와 고만고만하게 사는 삶’으로 그들을 이해했다. 대학 졸업은 이제 더 이상 더 나은 미래를 가능하게 해 주는 가능성의 출구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얌전히 학원 다니며 학교 졸업하고 대학까지 나온다 하더라도 전망 없어 보이는 미래만 가능한 현실이다. 굳이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섹슈얼리티 시장에 뛰어든 지수는 열악한 노동시장 상황 때문에, 번듯한 4년제 대학을 나오고도 룸싸롱에서 일하거나 대학을 나와도 ‘몸’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다른 언니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한다. 학력과 직업과 소득이 불일치하는 고용불안정 시대에 어차피 확실한 직업을 갖지 못하거나 안정적인 소득이 있는 남자를 만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면, 고가에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교환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그 놀라운 간파능력을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은 ‘앎’은 역시 포지션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계급은 젠더를 깨뜨리고, 젠더는 섹슈얼리티를 깨뜨리고

현재를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 유예 시키거나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으로 자신을 훈육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별반 차이 없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세대들이다. 이 세대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정말 적극적으로 교환한다. 대단히 적극적으로. 과거의 빈곤층 십대들이 성적 이중규범으로 자신의 성적 교환행위를 검열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남성을 비웃듯 성적 이중규범을 비웃는다.

재앙 같은 경제위기 속에서 신빈곤층 계급은 젠더를 깨뜨리고, 깨뜨려진 젠더는 섹슈얼리티를 깨뜨린다. 하지만 그 다음의 출구는? 불행히도, 아직은 없다. 새로운 조건에서 등장하고 있는 신빈곤층 십대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f 자도 모르면서 기존의 젠더 질서로부터 쭉 미끌어지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들이 시원하게 미끌어져 나갈 또 다른 공간이 부재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본과 직접 거래를 벌이며 더 적극적이고 더 대담하게 섹슈얼리티를 교환한다. 그렇지만 그 날의 지수처럼 이들도 쓴 커피잔을 앞에 두고 커피보다 더 쓴 내 인생이라고 어디선가 조용히 웅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지수와 연락이 닿으신 분은 알려달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 지수는 가명이다. 그녀가 살기 위해 스스로 만든 가면 같은.


덧붙임

민가영님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