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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배우다

[인권영화제를 허하라 ⑤] 성공회대 교수 조효제

연구년을 보내기 위해 미국에 갔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집 근처의 시립도서관에 가서 회원카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거주지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을 들고 도서관의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별도의 절차 없이 그 자리에서 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물론 무료였다. 카드를 내 주면서 직원이 말했다. “27년간 유효합니다.” 나는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다시 물었다. 또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내 나이에 27년을 더해 봤지만 금방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그 후 보스턴 시립도서관은 미국생활에서 가장 친숙한 장소가 되었다. 학교 도서관보다 더 편리한 점도 많았다. 우선, 집에서 아주 가까워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고, 시청각실에서 음반이나 영화를 빌리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지하실에 있는 시청각실에 처음 내려갔을 때 놀랐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온갖 종류의 영화 비디오와 음악 CD, 테이프가 소장되어 있었다. 나는 책을 빌려 준다는 말은 들었어도 영화까지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때 처음 들었다.

다큐멘터리 코너의 단골이 되다

처음에는 그 전에 못 봤던 극영화를 빌려 보다가 나중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 쪽의 단골이 되었다. 덕분에 주말에는 반드시 다큐멘터리 2~3편을 감상하면서 지냈다. 아마 다큐멘터리를 족히 100여 편 정도는 봤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아이도 다큐영화를 좋아해서 온갖 종류의 영화를 함께 보고 소감을 나누기도 했다. 덕분에 아이와 사이가 좋아졌으니 일석이조였다고나 할까. 나는 지금도 미국을 생각하면 그 때 감상한 다큐멘터리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제1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될 <기울어진 세계>는 미국의 석유회사 엑손모빌을 낱낱이 고발한다.

▲ 제1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될 <기울어진 세계>는 미국의 석유회사 엑손모빌을 낱낱이 고발한다.


역사물로 시작해서 우리는 장르를 넓혀 갔다.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은 당연히 보았고, 각종 환경, 공해 관련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았다.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라는 다큐영화는 자동차회사들이 전기자동차를 만들 능력이 있으면서도 석유산업과 결탁하여 그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는 음모를 다룬 작품이었다. 우리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이 인류에게 얼마나 거대한 피해를 주고 있는지를 목격하고 치를 떨었다. 자연스레 우리는 기업의 반사회적 행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기 시작했다. 법적 인격을 갖췄다고 규정되는 ‘기업’이 실은 얼마나 자기정화나 자기규제가 불가능한, 무책임한 집단인지를 속속들이 고발하는 기록들이 많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은퇴하면서 경고한 ‘군산복합체’ 발언의 배경에 대해서도 더욱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사실은 ‘군-산-정’ 복합체라고 발언하려 했으나 연설 직전에 ‘정’자가 빠졌다는 비화도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로 만난 미국 군수산업과 전쟁 이야기

한 가지 흥미 있던 것은 미국의 정치권 내에도 군산복합체의 위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진 세력이 있지만 함부로 발언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군산복합체가 초 정치적 존재이며, 국민들의 이익과 밀착해서 절대로 호락호락 소멸하지 않을 것임을 염려한다. 예를 들어, 군수산업은 공장을 전국 각지에 분산해서 건설한다. 그렇게 되면 지역경제와 군수산업은 한 배를 탄 운명이 되어서, 그 어떤 정치인도 자기 지역의 군수공장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못하게끔 된다. 만일 용감하게 군비축소니 군사예산의 평화적 사용이니 하는 문제를 거론하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누가 군산복합체를 정면으로 건드리려 하겠는가.

제11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조각난 이라크>는 이라크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제11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조각난 이라크>는 이라크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후 우리는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벌였던 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잔뜩 보았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전쟁을 좋아하고, 아주 조그만 외부의 도전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철저한 제국주의적 국가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라크전은 미국의 비극이자 재난이었다. 군인들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미 심신이 파괴된 ‘걸어 다니는 좀비’일 가능성이 높다. 참전 용사들로 이루어진 반전단체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미국정부가 행하고 있는 침략전쟁의 광기와 비인도성을 통렬하게 고발하였다. 이들 중에는 순수하게 애국주의적 동기에서 자원입대했다가 몸과 마음이 망가져서 돌아온 후 번민과 회한의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 아이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고등학교 교실에까지 군대의 모병관이 찾아와 아무 것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졸업 후에 입대하라고 권유한다는 것이다. 군 입대를 일종의 ‘취직’으로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미국의 국방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악을 불러 일으킨다. 그 밖에도 인권, 여성, 노동 등의 주제에 대해 우리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영화를 보았다.

인권영화제에 바란다

미국에서 다큐멘터리가 훌륭한 독립 장르로 취급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일반 영화와 거의 같은 대접을 받았다. 신문의 주말 판에서도 다큐영화는 일반 개봉영화와 똑 같은 대우를 받았다. 영화평, 광고, 개봉관 정보 등 아주 상세한 소개와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교육적·문화적·사회적 기능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렬한 예찬자가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특히 시각정보 처리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다큐영화 장르는 어떤 교과서도 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이번 인권영화제가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고 인간의 사회적 고통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덧붙임

조효제 님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