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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인권영화제를 허하라

고집스러움이 더욱 귀해 보이는 오늘

[인권영화제를 허하라 ③] 전업주부 담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바라보는 곳에 내 시선을 집중하게 되고, 또 그의 손이 닿는 곳이면 내 손도 내밀어 만져 보려고 하기 마련이지요. 인권영화제는 4년 전, 그렇게 제가 사랑하는 사람 뒤를 따라 쭐레쭐레 좇아 들어가 만나게 된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는 제 딸이었고, 저는 제 딸의 빛나는 시선과 낯선 동선과 일렁이는 열선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지요.

2005년 제9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 2005년 제9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낯설고도 빛나는, 일렁이면서도 차가운 감성으로, 이제 저는 인권영화제가 온몸으로 부딪치며 열어 보여주는 뜨겁게 살아 숨 쉬는 세계를 만납니다. 새롭게 만나게 되는 그 세계는 대체로 아프고 또 대체로 어둡지만, 영상과 목소리로 세상에 드러내어지는 순간, 저마다의 독방에 갇혀 숨죽이던 그 이전과는 무척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관객의 머리와 가슴에 심겨진 영상과 목소리는 세월이 지나며 또 다른 사실들과 현실들을 만나 창조적인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되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고여 있거나 정지되어 있는 사물들을 흐르게 하고 움직이게 하더군요. 제게는 그랬습니다.

끊임없이 두드리고 말 걸고 흔들어 깨우는

제가 한창 나이일 때 개관한 허리우드극장은 서울아트시네마로 이름이 신세대답게 바뀌어 있었지만 30여 년의 세월을 지내며 시설은 퇴락해져 있었습니다. 인권영화제는 너도나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하는 기업 후원조차 일절 받지 않고 거기에다 무료상영까지 고집스럽게 고수해 오고 있었습니다. 행사장 주변은 수수하고 조촐했지요. 하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내용과 활동은 결코 낡지도, 퇴락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두드리고, 말 걸고, 질문하며, 흔들어 깨우는, 진정한 진보가 그 안에 펄펄 살아 숨 쉬고 있었지요.

인권감수성에 흠뻑 젖어들며 새롭게 깨어난 제 삶의 행보는 분명 그 이전과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즈음 다니기 시작한 향린교회에서 여성인권소모임 활동에 참여하면서, 새롭게 체득하게 된 인권감수성이 인권의식으로 전환되었고, 또 인권의식은 주변의 여러 고립된 섬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습니다.

다다른 그곳에 조심조심 엉덩이 들이밀고 앉아,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기도 하고, 날선 눈초리를 풀고 걸어오는 말에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점점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들의 분노가 내 분노로 옮겨 붙는, 감성의 공간이동을 경험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공간이동한 그 감성은 그때까지와는 꽤 다른 방식으로 제 삶을 새롭게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제가 머물고 있던 공간 역시 섬이었음을 비로소 보게 된 것이었지요.

섬을 떠나 세상과 만나 출렁이다

제9회 인권영화제 상영작인 <슬로브핫의 딸들>

▲ 제9회 인권영화제 상영작인 <슬로브핫의 딸들>

<슬로브핫의 딸들>은 성서의 가부장적인 서술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주장하여 엄청난 이권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서울YMCA 이사회에 맞서 싸우는 여성 회원들의 지난한 투쟁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여성을 포함한, 소외되고 차별당해 온 주변부 계층의 시각으로 새롭게 성서를 해석해 보려는 ‘여성의 눈으로 성서 읽기’ 모임에서 이 작품을 함께 보면서, 한국 기독교 안에 팽배해 있는 여성 비하적이고 차별적인 여러 사례들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러한 참담한 현실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각자가 선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시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더군요.

<708호, 이등병의 편지>는,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세상을 향해 드러내고 또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표현하고, 자신의 양심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지극히 기본적인 권리조차 이토록 진귀한 일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압적이며 또 우리가 얼마나 그 폭압에 길들여져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효용성에 의해 생각과 행동을 조정당하고 있는지도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거칠고 시끄러운 소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만난 어눌한 목소리의 한 청년에게서 퍼져 나오는 빛이 어찌나 눈이 시도록 부시던지요. 이 작품을 본 이후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제 인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 군대 안의 인권 유린 상황에 더 주목하게 되었지요.

먹거리에까지 출렁여온 물결

또 먹거리를 구입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주부로서 일상적인 선택의 기준을 수정하도록 도전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소똥>은 제3세계에 생명공학이라는 이름으로 대량생산한 잉여식량을 팔아넘기려는 미국의 여러 연구소와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대항해 싸우는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존경스러운 행적을 다루고 있는데, 인도의 고유작물에 대한 외국 기업의 터무니없는 특허권으로부터 작물을 보존하기 위해 반다나 시바는 종자보존소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가고 있었습니다. 무지막지하고도 이기적인 ‘세계화’에 맞선 투쟁이 우리의 생존에 왜 절대 절명의 일인지, 또 유기농업은 결코 고급스러운 취향의 소비자를 위해서가 아니며 우리 후대가 살 이 땅과 생명을 위해 반드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제11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블랙골드>

▲ 제11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블랙골드>


<블랙골드>는 소비자가 왜 공정거래무역으로 생산되고 판매되는 상품을 사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전 세계에서 대여섯 개의 거대 커피 로스팅 회사들이 엄청난 이윤을 얻는 동안, 하루 8시간씩 닭공장 같은 공장에 앉아 원두를 손으로 선별해서 받는 일당은 50센트이고, 그렇게 선별된 커피원두는 1킬로그램에 불과 0.1달러에 팔려나갑니다. 커피원두 1킬로그램에 0.5달러만 값을 쳐 줘도 좋겠다고, 그러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겠다고 말하던 에디오피아 커피산지 농부의 얼굴이, 한 잔에 5천 원짜리 커피를 앞에 놓고 자꾸 떠오릅니다.

바지런한 눈길과 손길들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오던 <계화갯벌의 여전사>와 <어부로 살고 싶다>, 그다지 먼 얘기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차이나블루>와 <고스트>, 정치상황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난을 보게 하는 <칠레, 지울 수 없는 기억>이나 <불탑의 그림자> 그리고 <대추리의 전쟁>과 <전쟁기지 필요 없다> 등등. 제 의식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게 한 수많은 눈부신 작품들을 저는 인권영화제를 통해 만났습니다.

선하고 바지런한 눈길과 손길들, 그리고 용감한 발걸음들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과감사함을 전합니다.

절충과 타협으로 기본과 올곧음이 허물어지고 무디어진 요즘, 인권감수성의 날을 세워 지키기 위한 고집스러움이 더더욱 귀해 보입니다. 고집스러움…. 인권영화제가 끝까지 놓지 않기를 바라며, 성원합니다.

덧붙임

담은 님은 여성인권에 관심이 많은 전업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