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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자연적인 것'은 없다

소유권은 초월적 진리?

앞에서 몇 회에 걸쳐 주마간산으로나마 인권과 소유권, 나아가 화폐와 금융에 관련된 여러 쟁점들을 살펴보았다. 짧은 지면으로 인해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모름지기 대부분의 독자들이 “무엇이 이리도 복잡하단 말인가”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 같다. 이번 마지막 칼럼에서는 그러한 난해함과 복잡함이 내 짧은 재주 때문만이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맺고자 한다.

단순명쾌한 개념의 배후에 도사린 ‘자연’

인간 사회에서 어찌 보면 인권이나 소유권의 개념처럼 단순명쾌한 것도 없다. 하늘과 땅이 낳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생각, 그리고 나의 소유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런 생각에 반대해 인간이라도 다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없다든가 내 것이라고 꼭 내 것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논리를 만들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직선적이고도 거부할 수 없는 단순성을 가진 것이 인권이나 소유권 개념의 장점이자 그것을 옹호하는 운동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런 단순명쾌함은 두 개념 모두의 배후에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함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적인 세계관과 그에 기반을 둔 정치·사회 질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말할 것도 없이 ‘신(神)’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관과 질서가 무너진 근대 초기의 서구 문명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 원리를 찾아야 했다. 이때 기존의 ‘신’의 자리를 대신하여 새로운 조직 원리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개념들 몇 개가 등장하였으니, 그 중 가장 유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바로 ‘자연’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는 세계인권선언 17조의 영문본 (출처 : UN Photo)

▲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는 세계인권선언 17조의 영문본 (출처 : UN Photo)



‘자연법’과 ‘자연적 권리’

고대 그리스인들의 ‘퓌시스(physis)’로부터 물려받은 서구인들의 자연 개념은 결코 활력 없이 무정하게 축 늘어져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 내부에 이미 고유의 작동 원리와 운동 법칙을 모두 포함한 채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성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자연에 내재해 있는 원리와 법칙을 발견한다면, 성경 말씀 그리고 성경에서 비롯된 교회의 가르침이 모두 힘을 잃은 때, 새로이 건설할 인간 사회 원리의 기초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의 사상을 풍미하였다.

여기에서 ‘자연법’ 사상이 나오게 되고, 거기에서부터 ‘자연적 권리’라는 생각도 나오게 된다. 인권과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대적 논리의 원형도 바로 이러한 자연법 및 자연적 권리라는 사상에 크게 힘입고 있다. 인간이라면 모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늘에게서 부여받은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소유에 대해 자연적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자연적인 것’이란 존재하는가

그런데 이 ‘자연적’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압도적으로 전통적인 농경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18세기까지의 세상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소유라고 해봐야 무엇보다 토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며 거기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종류도 거기서 거기다. 또 토지를 중심적인 생산 수단으로 하여 생겨나는 사회 안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의 종류와 성격, 내용이라는 것도 크게 다를 수가 없다. 18세기 프랑스의 중농주의자(Physiocrats)들이 당시 번역되었던 공자나 맹자의 저서에서 큰 영감을 얻어 스스로를 ‘서양의 유학자들’로 자처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직후인 19세기 초 이래 지금까지 인류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을 불러온 두 개의 혁명을 맞게 되고, 그 이전 몇 천 년 동안 부동(不動)의 질서를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던 ‘자연’이라는 것도 ‘인간적인 것’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섞여 버리게 된다. 산업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그것이다. 전자는 이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여, 인간이 스스로가 기획하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자연을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상징적 사건 중 하나인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출처 : www.unl.edu)

▲ 프랑스 혁명의 상징적 사건 중 하나인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출처 : www.unl.edu)


프랑스혁명의 의미도 그 이상으로 심대하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질서는 신이나 자연의 원리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이성으로 만들어낸 원리에 맞추어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의 집단적 의지 및 실천과 무관한 채로 영구불변의 원리를 담고 있는 ‘자연적인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대의 변화에 맞춰 다시 정의되어야 할 인권과 소유권

이는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도 있다. 예전의 저 순박한 ‘자연법 사상’에 근거하여 만들어지고 또 정당화되었던 인권이나 소유권 개념은, 두 개의 혁명 이래로 끊이지 않는 근본적 변화의 물결에 들어선 현대의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공장이 들어서고, 온갖 금융 제도가 개발되고, 인터넷과 정보 지식의 유통 없이 작동할 수 없게 된 현대의 산업 체제에서 도대체 소유권의 개념이 17세기 존 로크 시대와 같을 수 있을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벌지 않고서는 아예 물마시고 잠자는 일조차 불가능한 대도시 한복판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을 13세기 영국의 ‘인신보호권(habeas corpus)’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인권과 소유권이라는 인간 문명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산업적 기초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과 조응하거나 때로 모순을 일으키면서 변해 나가는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는 또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면밀히 관찰하여 실정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 두 개의 개념이 전혀 알맹이 없는 허울 좋은 구호가 되어버리거나 또 다른 이들의 행복과 삶을 옥죄는 사실상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변해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남긴 빛줄기

그러니 21세기 현대라는 조건에서 ‘인권과 소유권’이라는 화두에서 나오게 될 이야기들이라는 게 단순 명쾌하게 풀릴 리가 없다. 누군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화법을 빌어 그것을 단순하게 만들어 마구 휘둘러대려고 한다면 “이제 자연적인 것이란 없다”는 말로 타일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인간의 권리도 소유권도 ‘산업과 정치 사회 전체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여 계속 새롭게 정의하고 제도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이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초 생시몽(Saint-Simon)이나 로버트 오웬(Robert Owen)과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다. 이념적 깃발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이후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도 소유권도 더 이상 초월적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 현실 파악에 근거한 끝없는 토론과 혁신의 대상이라는 그들의 사상은 지금도 변치 않는 지혜의 빛이 되고 있다.
덧붙임

홍기빈 님은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