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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죽음을 기억하라

여성 빨치산 정순덕의 고통과 희망

[기획] 죽음을 기억하라 (18) 정순덕

[편집인주] 모든 죽음은 산 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지만 어떤 죽음은 산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런 죽음은 죽은 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긴다. 생물학적 죽음을 수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도 있다. 죽음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한국사회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인권오름>은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3년부터 최근까지의 죽음 가운데 점점 잊히고 있지만 산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사회 인권의 현실을 점검한다.


그녀의 이름은 정순덕.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여름경이다. 그 얼마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그녀가 막 봉천동 ‘만남의 집’으로 돌아온 직후였던 것 같다. 그녀를 봤을 때, 책으로 접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대고 있는 듯, 가슴 아리고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받쳤다. 반신불수의 몸으로라도 움직여야 산다며 부엌일을 하시는 모습은 잊히지 않은 무엇으로 남아 있다. 성년이 되고서야 알았지만, 정순덕은 1960년대 빨치산의 대명사였다. 마지막 빨치산, 게다가 여성 빨치산이라니.

정순덕의 생전 모습 [출처]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 정순덕의 생전 모습 [출처]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한국사회에서 빨치산이란?

돌아보면 한국에서 빨치산에 대한 인식에는 나름대로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빨치산은 곧 공비이거나 뿔 달린 빨갱이였다. 만일 일말의 인간으로 보려는 시선이 남아 있었다면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남과 북에 의해 버려진 존재쯤으로 인식되었을까? 이런 점에서 과거 우리 사회에는 빨치산에 대한 전혀 다른 상이 존재했던 것 같다. 서구의 빨치산이 애국심의 상징이라면, 한국의 빨치산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70, 80년대 중고등학생 시절 텔레비전의 ‘주말의 명화’나 공휴일 영화 프로그램은 미국 할리웃 영화로 도배되었다. 영화 중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등의 반파시즘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간간이 끼어 있었다. 그 영화들을 보면서 서구의 빨치산이 펼치는 정의감 넘치는 애국적 행위에 감동받고 눈물까지 적시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빨치산 영화인 <남부군>(이태 원작, 정지영 감독, 1990)이나 <태백산맥>(조정래 원작, 임권택 감독, 1994)이 상영되기 이전까지 얼마 안되는 빨치산 소재 영화들로는 <피아골>(이강천 감독, 1955), <산불>(차범석 원작, 김수용 감독, 1967), <장마>(윤흥길 원작, 유현목 감독, 1979)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영화들에는 나름대로 빨치산의 애절한 사연이 깔려 있기는 하나 여기서도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 또는 희생자로서 그려져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빨치산에 대한 인상은 빨갱이, 공비나 희생자 같은 범주에 속했다.

이러한 빨치산의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전직 빨치산이었던 이태의 실화소설 <남부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이었다. 이 책들은 1980년대 중반 우리 사회의 현대사 바로 알기, 북한 바로 알기 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또한 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1989~1991)는 빨치산의 역사를 일제 말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민족해방운동사로 복원할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우리 앞에 현실로 등장한 빨치산들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하며, 통일운동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비전향장기수’의 일원으로서 양심수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면서 어쩌면 진보운동가들이 마음 깊숙이 갈망하고 있던 영웅으로 등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영웅 가운데 63명이 2000년 9월 2일, ‘송환’되었다. 그 후 간혹 그들에 관련된 북에서의 ‘영웅적 활동’과 생활상이 보도되고 있고, 수기집들도 출간되고 있다.

그 이후 빨치산 문제가 잊힐라 할 때쯤 나온 김동원 감독의 <송환>(2003)은 빨치산 문제를 조금은 인간의 문제로 접근시켜 놓고 있었다. 또한 김진열 감독의 <잊혀진 빨치산>(2004)은 여성 빨치산이었던 박순자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성으로서, 빨치산으로서, 통일운동가로서의 삶을 조망하여 그녀의 아픔과 희망, 투쟁을 다루고 있었다.

여성성과 여성 빨치산

사실 나는 1999년부터 2년간 비전향장기수의 생애사를 구술받는 작업을 해왔다. 그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작업의 특성상 주인공인 비전향장기수는 남성이었다. 작업을 하는 내내 궁금했던 주제 중 하나는 여성 빨치산에 관한 얘기였다. 가까이 있던 정순덕 선생님은 당시에는 조사하기 어려운 육체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얼마 후 변숙현 선생님을 만나 생애사를 접하며 남성 빨치산 출신의 선생님들과 다른 결의 감동과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만 해도 아마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던 질문은 ‘여성성 없는 여성 빨치산의 만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성은 운동권에서나 사회에서도 보살피고 가정을 지키는 부차적 존재로서 필요 없을 땐 언제든지 사회에서 퇴장당해야 했고, 역사에서도 망각되어야 했던 존재였다면, 여성 빨치산은 설령 잊혔더라도 그것이 아니었기를 바랐다.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는 강인한 전사이고, 그래서 빨치산 사회는 성별분업 없이 모두 평등하게 싸우고 똑같이 밥해먹기를 바랐다. 이태의 <남부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여성 빨치산들은 남성 작가들의 시선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모두 밥이나 하고 빨래하며 비서로 일하는 부차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던 것이기를 바랐다.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1990)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연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어떠했을까?

역사 속 정순덕도 이런 기대감과는 멀었다. 그녀에게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염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으나 그녀가 빨치산이 된 것은 1950년 9월 27일,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산으로 떠난 남편 성석조를 만나려는 간절한 소원 때문이었다. ‘이영회부대’ 전사로서 차츰 전투를 배우긴 했으나 한동안 그의 주 업무는 밥하고 빨래하고 병구완하는 일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에는 망실한 빨치산이 되어 이홍회, 이응조와 함께 3인조로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1963년 11월 12일, 두 사람은 죽고 그녀만 생포되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순덕은 1985년 8·15 특사로 가석방될 때까지 23년 동안 갇혀 살았다. 석방 후 하층 노동자로 오래 전전하다가 1995년경 서울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에 기거하면서 일정한 정도 생활에 안정을 얻었다고나 할까. 1999년 3월에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후 반신불수의 상태에서도 웬만큼 거동하다가 2004년 재차 마비가 와서 그해 4월 1일 별세하였다.

일찍이 정충제에 의해 어렵게 집필된 <실록 정순덕: 빨치산 13년 그 통한의 기록>(전3권, 1989)은 어떤 빨치산 기록물보다도 생생하고 구어적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읽으면서도 나의 강요된 인식이 나름대로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빨치산이고 사회주의자라면 평등해야 하고 그렇다면 남성=전사, 여성=가사라는 성별분업이 깨어져야 한다는 당위적 기대감이 계속 작동했고, 계속 실망했다.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의 소망이 ‘다음 생에는 잘 생긴 신랑 만나서 족두리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실망감이라고 할까?

그런 즈음에 스스로에게 물었다. 여성 빨치산에게 나는 그릇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전에 여성노동운동가의 생애사 조사를 하면서도 여성성 없는 노동운동가의 면을 기대하면서 문제의식을 ‘실망’에서 ‘재구성’으로 변화시켜야 했던 점을 떠올렸다. 아니 이것은 나의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여성 학생운동가에게 여성성 없는 학생운동가를 기대했던 점과도 일맥상통했다. 여성성/남성성의 구별이 없는, 다시 말해 중성화되거나 남성화된 여성으로 상정한 것은 아닐까 하는 깊은 반성이 밀려왔다.

다시 물었다. 남성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 여성성 없는 여성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인가? 또한 밥하고 먹는 일이 총칼 들고 싸우는 일보다 부차적인 일인가? 아, 아니다. 진정 아니다. 왜 총칼 들고 싸우지? 다 잘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총칼질보다는 부엌일이야 말로, 인간의 생명권을 지키는 데에 더욱 절실하고 없어서는 안될 일이다. 여성의 역사가 정녕 전설적 여성전사 신화인 아마조네스의 역사가 아니라면 그 역사 속에는 가부장적 시대상이 살아 있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다고 하여 지향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더군다나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아닌가? 당시 인구의 대다수가 의심하지 않던 일을 21세기 인간이 열을 내며 빨치산의 성별분업을 불평등의 사례로서 꼽는다는 것은 결과환원론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정순덕이나 여성 빨치산의 역사를 가려진 빨치산의 역사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영웅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정순덕이나 변숙현, 박숙자 등과 같은 여빨치산은 가식 없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 과정에서 부녀자에서 전사로, 장기수로, 어머니로, 통일운동가로서 운명을 감당했다. 또한 예쁜 꽃을 좋아하여 가꾸기를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기를 좋아했다. 정순덕 선생님에게 “당신의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남편 성석조와 평화로운 통일세상에서 재미나게 살아보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다.

이제 빨치산을 빨갱이의 자리에서도 영웅의 자리에서도 내려와 인간의 자리로 회복시켜야겠다. 여성이거나 또는 남성이거나, 그러면서도 그 시대의 복잡한 욕망에 엉켜 나름대로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면서 혹은 의도치 않게 거짓말도 하고 사소한 나쁜 짓도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바라봐야 한다. 역사가 그런 사람들의 기록이라면 수만 명에 이르렀을 빨치산도 한반도 분단사에서 나름대로 분단에 저항했던 민중들의 기록으로 위치 지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성 빨치산 정순덕은 2004년 세상과 이별하기까지 2차 송환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희망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덧붙임

◎ 김귀옥 님은 한성대 교양학부 교수(사회학)입니다. 분단과 전쟁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바꾸어 왔는가를 현지조사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하여 연구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