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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의 인권이야기] 커뮤니케이션 권리의 재구성을 위하여

넘쳐나는 미디어, 단절된 소통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18일,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은 이미 선거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진흙탕 같은 상황이 대선 이후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니까 앞뒤를 따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선에 대해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원고를 쓴다는 것도 그렇고, 결과를 알지도 못하면서 미리 뭐라고 떠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다만 그 결과가 어떻든,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하지 않을까 싶다.

미디어와 소통

하나는, 지난 10여 년 한국 사회의 모든 중요한 변화가 그러했듯이 이번 대선 역시 ‘미디어’가 중요한 변수의 하나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막판에 불거진 'BBK 동영상'처럼 상황을 요동치게 만든 미디어가 있었는가 하면, 선거 기간 내내 넘쳐난 미디어들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지 논쟁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은 좋아지고 있지 않다는, 그리고 사람들은 희망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적인 인식의 재확인이다. 그리고 이 넘쳐나는 미디어와 절망적인 현실은 서로를 재생산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끝없이 확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미디어는 넘쳐나는데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고, 마치 소통이 잘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만이 커갈 뿐 변화를 위한 성찰, 성찰을 위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건 정말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우선 미디어는 넘쳐난다. 미디어들이 넘쳐나니 당연히 그 미디어를 채우는 이른바 콘텐츠들도 넘쳐난다. 하지만 논쟁과 토론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사회 전반의 정치적, 문화적 인식의 확장은 계속 지체되기만 한다. 그래서 결국 이런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된다. 소통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결국 소통함으로써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물론 ‘소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소통’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소통하다”라는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의미 있는 소통이 된다. 소통을 할 내용, 소통을 하는 주체, 소통의 상대, 소통의 방법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 소통은 단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의 소통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어느 부분의 공백이 현재와 같은 답답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 걸까? 왜 사람들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는 대상에게 자신의 권리를 이양하고, 제대로 된 대안을 만들려는 이들은 고립된 채 혁신을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은 어차피 단순하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고, 여기서는 이 문제를 인권 현실, 인권의 개념과 관련해서 추적해보려 한다. 거칠고 불확실하지만 차근차근 가설을 만들고 그것을 실험하며 변화의 맹아를 발견해 보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선 짚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소통의 권리’를 알고 있고 합의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단이다.

▲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가질 자유를 포함하며, 또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국경을 넘거나 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받고 전할 자유를 포함한다." [출처] africa.rights.apc.org



소통, 인권, 그리고 표현의 자유

인권 혹은 인권운동의 기본 개념과 관련해서 소통의 문제를 생각할 때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이다.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누구나 읽어봤다는 착각에 빠지곤 하는 이 인권선언의 원문은 이렇다.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가질 자유를 포함하며, 또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국경을 넘거나 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받고 전할 자유를 포함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류는 이 표현의 자유 개념을 미디어 혹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핵심적인 인권의 개념으로 평가해왔고 그에 기초해서 논리를 세우고 투쟁해왔다. 투쟁은 많은 것을 바꿨고, 또한 이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투쟁을 통해서 변한 건 정말 많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때로는 생명을 건 싸움 덕택에 우리는 이제 “언론의 자유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모호하지만 방향은 뚜렷한 명제를 누구나 동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소한 가위손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영화를 보는 일은 없어졌다.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자유로운 소통의 공간인 인터넷을 통해서 “국경을 넘거나 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받고 전할 자유”를 날마다 누리고 있다. 기술 발전의 덕택에 이제 웬만하면 누구나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고 그 콘텐츠를 소통할 수 있다. 덧붙인다면, 인권영화제의 주최자는 더 이상 구속되지 않고 있고, 팩스에서 인터넷 웹메일로 바뀐 인권운동사랑방의 소식지는 매주 우리의 메일 박스를 채우며 새로운 소식과 관점을 전해준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것 혹은 이상하게 변한 것 역시 많다. 주류 언론은 여전히 가끔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등급제를 의식한 영화 제작사나 수입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가위손을 사용하고 있다. 인터넷이 보장한 그 무한한 자유의 수혜가 소수의 자본에 의해 독점되는 가운데 실명제니 등급제니 하는 각종 재갈들이 인터넷을 공허한 엔터테인먼트의 자유로운 배설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고 있다. 아무리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어도 당신이 언론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줄이 닿지 않는다면 당신의 카메라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은 대부분 탈정치적이고 안전한(?) 공간일 뿐이다. 역시 덧붙이자면, 현재의 영화 관련법은 여전히 인권영화제와 같은 자발적 영상축제의 공간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있지 않다(정치상황이 변화하면 언제라도 현행법은-그나마 이전의 악법을 폐기하고 만든 법이지만-족쇄가 될 수 있다). 사랑방의 소식지 역시 혹시 몇몇 사람들의 메일박스에서는 그저 저장만 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갑자기 불온한 혹은 불법 콘텐츠로 규정되어 삭제 명령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발전, 퇴보, 혹은 새로운 걸림돌의 등장 등은 시간이 흐르다보면 우리가 언제나 마주하게 되는 세상사의 이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상황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피곤하지만) 끝없는 투쟁의 과정이고, 자유롭게 하는 것만으로 권리는 보장되지 않으며 때로 어떤 부분의 자유가 확대되는 것은 총체적인 권리의 축소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권리의 재구성, 실천의 재구성

좀 더 논쟁적으로 접근해보자. 인권선언에서 언급된 전통적인 표현의 자유는 재해석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접근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게 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권리들이 보장되도록 하면서 전체 커뮤니케이션 관련 권리 개념의 프레임을 새로 만들든지, 혹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하는 다양한 권리들을 종합하고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그 최고 상위의 개념으로 (가칭)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새롭게 구성하든지 말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권리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그래서 교과서의 한 쪽을 다시 쓰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좀 더 깊숙이 파고들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설명했을 뿐인 현실의 상황은, 우리가 그동안 실천의 근거로 삼았던 권리 개념이 아직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개념보다 앞서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그러나 아직 우리가 그것을 개념으로 정립하고 사회화하지 못한 미완의 개념이 아직 인권운동 내부에서 정립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권리의 개념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전략과 실천 그 자체를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인권운동의 영역에서 이 새로운 재구성 작업은 한편으로는 인권운동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 영역과 관련된 권리의 개념을 재구성하며 이를 활동의 영역과 철학에 반영하는 것이며, 아울러 인권운동 혹은 인권과 관련된 공적 기구 및 정책이 그러한 재구성의 내용을 자신의 미디어 전략,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이 과정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닐 텐데,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은, 미디어가 융합되면서 융합시대 미디어의 밑그림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모두 다시 그려지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리고 영역과 경계를 넘어서는 운동의 소통, 소통의 운동이 빨리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개념과 실천의 재구성 과정은 여유롭게 진행할 성질의 것은 못된다.

다시, ‘소통’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다음 기회에 좀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다시 소통의 문제로 첫 번째 이야기, 아니 예고편을 마무리하자. 소통은 운동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고, 경계가 확연히 그어진 (이것도 사실 큰 문제인데) 이른바 운동권과 그 바깥과의 소통의 문제이기도 하고, 전사회적인 상호 소통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통에 집중한다고 해서 현재의 질곡을 벗어나는 특효약을 발견하진 못하겠지만, 소통에 대한 제대로 된 집중, 그리고 한 분야 그것도 삶과 관련해서 매우 근본적인 분야인 인권(운동)에서의 소통에 대한 집중과 그를 기초로 한 개념과 실천의 재구성은 질곡을 벗어나는 여러 계기들 중 하나로 작동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통의 권리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권리가 어떻게 제안되고 합의되고 실천되는가 여부는 한 차례의 선거보다 훨씬 중요하다. 선거는 소통의 결과이자 소통의 평가지표일 뿐이니까.
덧붙임

◎ 김명준 님은 미디액트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