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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좀비들의 외침, “살아있다고 사기 치지 마”

비참한 현실에 신나게 태클 걸다

나는 18살 청소년이다. 내년에 수능을 앞둔, 입시를 준비하는 청소년.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아볼 여유도 빼앗긴 채, 그저 내로라하는 대학 진학을 위해 ‘죽은 듯이 공부만 해야 하는’ 입시 준비생. 그러나 다행히 최근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날이 있었다. 분주했던 지난 며칠 사이의 기억들은 아직도 나를 가슴 뛰게 한다. 그날은 바로 11월 3일, 학생의 날! “나 살아 있소!”라고 외쳤던 2007 학생의 날 행사에 대한 나의 기억을 조금, 나눠봐야겠다.

“반쯤 죽은 좀비로 살아갈 순 없어”

이번 학생의 날 행사는 청소년 인권운동에 발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히나 그동안 학교에서 맞이했던 지루하고 불편했던 학생의 날과는 사뭇 달라 더 의미가 있었다. 해마다 학생의 날이면 비슷한 레퍼토리의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을 듣곤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심지어 학생의 날의 기원인 ‘광주학생항일운동’ 관련 단체 이름이 수능에 잘 나온다는 얘기에 그 단체들 이름까지 죄다 외우기까지 했다! 으악, 생각만 해도 징그러운 기억들. 그런데, 올해는 아니었다.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 말씀 대신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친구들과 함께 우리가 직접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했다. 학생의 날 몇 주 전부터 회의에서 논의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전날 최종 점검까지, 무척이나 분주했던 날들이었다. 모두 바쁜 일정 속에서도 엄청난 열정들을 쏟아냈다.

학생의 날의 현재적 의미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제한된 과거에 구속돼 있다.

▲ 학생의 날의 현재적 의미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제한된 과거에 구속돼 있다.



이런 열정들 속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 얼마 전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는 살벌한 집단체벌이 있었고, 그 학교 옆에 위치한 모 고등학교에서는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여고생이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 최근에는 전북의 한 고등학교에서 보충수업을 안했다고 죽도로 학생을 패는 동영상이 뉴스에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런 비참한 일들은 섬뜩하게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일들이다.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야간 타율학습과 보충수업,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통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복장/두발 단속, 게다가 우리를 입시기계로 만드는 유래 없는 ‘명문대’ 학벌중심주의. 이런 일상적인 폭력과 억압적인 교육구조 속에서 정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좀비가 되어버린 우리들. 게다가 11월 3일 학생의 날은 수능을 얼마 앞둔 날이어서 더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답답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있다고 외치고 저항해야 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담아내서 외쳐야 했다. 더 이상 입도 뻥긋 못하는, 살아있어도 죽은 좀비로 살아갈 순 없다고 우리의 몸짓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이번 행사의 주제는 <2007 돌아온 학생의 날, 저항&부활 - "살아있다고 사기 치지 마!">가 되었다.

비참한 현실에 기념이 웬 말?

우리의 저항 행동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 기념식 현장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갖는 것으로 시작됐다. 지난해부터 학생의 날 공식 명칭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어이가 없었다. 78년 전 그날의 학생들은 단지 ‘국가의 독립’, ‘일제 반대’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와 자치권, 교육제도의 개혁 등을 함께 요구했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은 다른 요구들은 모두 깡그리 무시한 채 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명칭 속에 그날의 외침들을 박제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높으신 분들 한 말씀씩 하시는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치렀다. 이건 완전 기만이다. 청소년의 비참한 인권 현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갈수록 더 잔인한 입시제도를 만들어서 청소년의 삶을 힘들게 하는 장본인들이, 학생의 날을 기념한다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기념식이 열리는 유관순 기념관 근처에서 관리하시는 분과 실랑이를 벌여가며, 우리는 “비참한 현실에 기념은 없다”고 외쳤다.

순응을 강요하는 수능 주술은 깨졌어!

오후에는 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캠페인과 행진을 진행했다. 좀비와 귀신, 다시 하기엔 부담스런 분장을 하고 퍼포먼스 연습을 거쳐 부랴부랴 명동 유네스코회관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귀신과 좀비 분장을 한 우리들은 한손에는 홍보 전단지를, 다른 한손에는 큰 공에다 붙일 ‘학생 인권 부적’을 들고 다니며 학생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적어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설고 무서운 분장을 한 우리들과 마주치길 꺼려했지만, 이야기를 건네고 나면 어느새 공감하고 부적 위에 학교에서 바뀌어야 할 것들을 부지런히 써주었다. “학생도 사람이다”, “폭력보다 더 강한 것은 존중이다”, “내 머리카락 내놔”, “입시야 물렀거라” 등등 다양한 요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부적 위에 적힌 메모들을 바라보면서 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나, 왜 우리는 이렇게 ‘죽은 듯’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어두워졌다.

명동 거리를 오가는 청소년들이 학생 인권을 되찾는 부적을 직접 써주었다.

▲ 명동 거리를 오가는 청소년들이 학생 인권을 되찾는 부적을 직접 써주었다.



행사 중반쯤에는 귀신과 좀비들이 모여 ‘순응[수능]대박 퍼포먼스 - 귀신이 산다’를 했는데, 지금 학교 현실을 통쾌하게 비꼰 퍼포먼스였다. 오리걸음 체벌을 당하다 죽어 죽어서도 오리걸음만 하는 귀신, 체육 줄넘기 수행평가를 준비한다고 과외하다 죽어서 줄넘기만 하는 귀신, 답안지 밀려 쓰는 바람에 수능을 망쳐서 죽어서도 마킹만 하는 귀신, 세상이 괴로워서 고개만 설레설레 젓다가 죽어서 고개 돌리는 귀신 등 퍼포먼스에 등장한 귀신들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아니 세상의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중 누군가의 모습이기도 했다.

“순응(수능) 주술은 이제 깨졌어~!”

▲ “순응(수능) 주술은 이제 깨졌어~!”



“나는 자랑스러운 수능 대박 앞에 자유와 인권을 팽개치고 스카이(S,K,Y)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마쳐 무조건 순응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순응’만이 강요되는 ‘수능’ 주술을 깨기 위해, 우리들은 ‘순응[수능] 대박’이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을 가위로 시원하게 찢어 날려버렸다. 그 순간 어찌나 통쾌하던지. 몇 사람은 수능 대박을 기원하는 행사인 줄 알고 지나쳐가기도 했는데, 그 점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우리가 바꿔, 어른에게 맡기면 낚여!

이날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학생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즉각 마련하는 것, 입시경쟁교육을 중단하라는 것, 그리고 청소년의 참여권과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 이 당연한 권리를,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갖기엔 버겁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들의 바람을 담은 공을 굴리는 거리 행진으로 학생의 날 행사는 끝이 났지만, 아직 우리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청소년 인권을 되찾는 그날까지, 폭력과 입시의 억압에 시달리는 좀비이기를 거부하는 우리들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이날 실버라이닝의 팽이가 직접 만들어온 노랫말이 아직도 귓가에 들린다.

“이제는 바꿔! 우리가 바꿔! 어른에게 맡기면 낚여!”
덧붙임

◎ 최은지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청소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