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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후퇴시킬 감시사회로의 진입

휴대전화 감청, 통화기록 보존 가능케 할 통신비밀보호법 개악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지난 20세기에 이루었다고 하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성과가 무색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는 신자유주의로 치닫는 자본의 무한경쟁과 각축 속에서 자본의 보호자가 되어 소비자, 소수자, 약자에 대한 약탈을 방관하거나 돕고 있다. 그 와중에 인권과 민주주의는 무참하게 억압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억압이 교묘한 대중 조작으로 포장되어 호도되고,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거나, 절차적 민주주의를 충족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오랜 인권의 역사 속에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라는 인권이 차지해 온 비중은 절대적이다.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는 인간 존엄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누리는 동안에는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밝히고 싶지 않은 사생활이 공개된 후 평생 인간의 존엄이 짓밟힌 채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 그 절대적인 가치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나아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기도 하다.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가 온전하게 보장되어야 그로부터 양심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나 그 밖의 여러 사회적, 정치적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계를 감시하는 '빅브라더의 눈'은 현실로 도래할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악은 이러한 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출처; networker.jinbo.net>

▲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계를 감시하는 '빅브라더의 눈'은 현실로 도래할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악은 이러한 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출처; networker.jinbo.net>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새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표현의 자유’의 가치를 되묻게 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인터넷에 글을 쓸 때는 실명을 밝혀야 한다는 인터넷 실명제가 도입되었고, 선거 시기에 인터넷에서 정치적 견해를 밝힐 때 실명을 밝혀야 한다는 선거법의 인터넷 실명제가 실시되었다. 이처럼 의사소통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제도가 도입됐음에도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큰 비판이 없었다. 놀라운 일이다.

감청장비와 인터넷 사용기록 보관 의무화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그런 와중에 또 다시 우울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전국민의 휴대전화 감청이 가능하도록 전기통신사업자에게 감청장비를 갖추도록 의무화한다는 것이다. 또 사업자로 하여금 전국민의 휴대전화 사용내역과 인터넷 접속지를 추적할 수 있는 아이피 주소와 그 밖의 인터넷 사용기록을 보관하도록 의무화한다는 것. 사업자가 이를 어길 경우에는 형사처벌을 한다는 내용까지 들어있다.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에 대해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당에서는 찬성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곧 국회 법사위를 통과하고 본회의에 상정돼 의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큰 일이다.

이런 법안을 도입할 때 정부는 항상 범죄수사와 테러 진압,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든다. ‘선량한 국민’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백여년의 투쟁을 통해서 그 가치가 확인되고 헌법에 성문화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비밀과 자유’의 가치는 ‘범죄 수사’, ‘테러 진압’, ‘명예 훼손 방지’ 등의 이유로 쉽게 허물어서는 안되는 너무나도 중요한 가치이다. 이를 제한하려면 그 제한이 부득이하고, 다른 방법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제한은 필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휴대전화 도청과 통화기록의 의무보관, 인터넷 사용기록의 의무보관은 범죄수사와 국가안보를 위한 ‘필요 최소한의 부득이한 조치’인가?

전국민 대상으로 한 감시와 사찰, 민주주의 후퇴시킬 것

국민의 대다수인 4천여만명이 가입해 있는 휴대전화는 개인 사생활의 집약체다. 휴대전화는 그야말로 개인이 형성하는 생활의 총체이며 개인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이런 휴대전화 이용기록이 저장된다는 것은 4천만 국민의 사적인 기록이 남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3,800여만명의 국민이 평균적으로 연간 714시간 남짓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은 어떤가? 그 이용기록이 기록으로 저장되어 남는다면 이것 또한 민감한 사생활의 집약이 될 것이다. 1990년 보안사에서는 1,303명의 민간인 사찰카드를 만들어 관리를 해 나라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통신사가 전국민의 1년간의 휴대전화 이용기록을 보관하고, 인터넷 서비스업체가 전국민의 1년간 인터넷 이용기록을 보관하게 된다면, 보안사의 사찰카드나 1,303명의 사찰은 우스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꼼꼼하고 세세한 전국민에 대한 사찰카드가 작성되고 관리되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는 감시사회에서 개인의 사생활의 자유는 지켜질 수 없다. 우리는 지금도 이미 수많은 감시에 노출되어 있다.<출처; rebeccahahn.com>

▲ 항상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는 감시사회에서 개인의 사생활의 자유는 지켜질 수 없다. 우리는 지금도 이미 수많은 감시에 노출되어 있다.<출처; rebeccahahn.com>


아무리 범죄수사나 테러진압을 목적으로 내세운다고 해도 이런 기록이 기업에 남겨지고 국가로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4천만명의 사생활을 기록하고 관리하면 인권이 위축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몇 명의 범인을 잡겠다고 4천만명의 사찰카드를 만들어 보관하라고? 더구나 휴대전화에 가입하려면 실명으로 가입하도록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인터넷도 실명으로 가입해야 한다. 이 사회에서 사는 한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휴대전화 감청도 심각한 문제를 낳기는 마찬가지다. 국가가 국민의 휴대전화 통화를 감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통신사업자에게 특수한 장치를 개발하도록 하고, 그 장치를 이용해서 전국민의 휴대전화 통화를 엿듣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가 엽기적이다. 게다가 통신사업자에게 법으로 이런 장치를 만들도록 강제하겠다는 것은 공권력의 남용이다. 그 이유를 아무리 범죄 수사나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내세우더라도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부터 국가가 얼마나 인권을 우습게 알고, 민주주의를 하찮게 보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휴대전화 감청을 할 수 없어서 국가안보에 치명적 위험이 생긴다는 논리는 가당키나 한 것인가? 앞으로는 범죄수사와 테러진압을 위해서, 모든 전자우편을 실명으로 개설하도록 하고 사업자로 하여금 1년간 전자우편을 보관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려면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의 존엄,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근간이 되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비밀과 자유가 소중한 것이다. 최근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인권의 근본 가치를 훼손하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
덧붙임

이은우님은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이자 진보네트워크센터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