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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보자 폴짝]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 내 친구

오동의 일기

2006년 ○월 ○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학교 운동장에서 애국 조회를 했다. 난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작기 때문에 맨 앞에 서야했다. 작년엔 동근이가 맨 앞에 섰었는데 올해는 동근이랑 다른 반이 돼서 내가 맨 앞이 됐다. 왜 조회 때는 줄을 키대로 서야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빨리 키가 커서 다섯 번째 줄 정도에 섰으면 좋겠다.

“양팔 간격 앞으로~ 나란히, 좌우로~ 나란히”

선생님의 구령에, 우리는 앞 사람의 어깨와 옆 사람의 손끝을 보며 줄을 맞췄다. 옆에 서 있던 규희에게 따듯한 웃음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줄 맞추느라 손끝만 쳐다봐야 했다. 줄을 맞추고 나자 선생님은,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애국가는 1절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일동, 국기에 대하여~ 경롓!”

하고 외쳤다. 난 가슴에 손을 얹고 언제나 그랬듯 태극기가 아닌 내 친구 정재를 쳐다봤다. 역시나 정재는 가슴에 손을 얹지 않고 있었다. 엄숙한 음악이 흐르고 자주 듣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주 듣기는 했지만 그 아저씨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미국의 학교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때가 있었네요.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아직도 애국조회 때 항상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합니다. 왜 국기에 경례를 해야 할까요?<출처; aoshs.wichita.edu>

▲ 미국의 학교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때가 있었네요.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아직도 애국조회 때 항상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합니다. 왜 국기에 경례를 해야 할까요?<출처; aoshs.wichita.edu>



내 친구 정재

내 친구 정재는 ‘여호와의 증인’이다. 정재는 국기를 바라보며 맹세하는 것을 신이 아닌 사람이나 물체를 종교의 대상으로서 숭배하는 ‘우상숭배’라고 했다.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믿는 그리스도교랑 이슬람교 같은 데에서는 국기에 대한 맹세나 경례를 금지한다고 한다. 정재 말이 사실일까? 어쨌든 정재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 난 다른 사람들이 다 경례를 하는데 혼자 경례를 안하고 있는 정재가 참 용기 있다고 생각한다. 난 부끄러워서 그런 건 잘 못 하는데. 그런데 친구들 중에는 정재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놀리는 애들이 많다. 그리고 정재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한다.

“넌 왜 국기에 대한 경례 안 해? 우리나라가 싫어? 울 아빠가 국기에 대한 경례 안 하면 매국노라고 했어”

정재는 우리나라가 싫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정재에게 뭐라고 하지만, 정재는 친구들에게 하지 말라고 시킨 적도 없고 우리나라를 욕한 적도 없다. 그냥 종교적 이유로 경례를 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하고 싶다고 하면 그만이다. 다만 정재는 종교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양심에 따라 굳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지 안하는지를 꼭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정말이지 국기에 대한 경례는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만 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속으로 하던가. 그런데 정재가 뭘 좋아하든 싫어하든 왜 남들이 상관하는 걸까?

대표적인 경례 방식 중 하나인 나찌식 경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누군가에게 경례를 하고 무언가에 맹세를 하는 것은 결국 별로 다르지 않아요.<출처; www.qsl.at>

▲ 대표적인 경례 방식 중 하나인 나찌식 경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누군가에게 경례를 하고 무언가에 맹세를 하는 것은 결국 별로 다르지 않아요.<출처; www.qsl.at>



몸과 마음을 바치라고? 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난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대체 우리는 언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 걸까? 그리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은 또 무슨 뜻이지? 도무지 자세한 설명이 없는 불친절한 맹세문이다.(몸과 마음을 바칠 중요한 일인데 자세한 설명 한 마디 없다니.) 결국 아무 때나 국가가 시키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라는 얘기인 걸까?

물론, 국가는 고마운 일을 많이 한다. 우리가 쉽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수도시설을 만들어 주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길이나 다리를 놓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의 살림을 맡은 정부에 세금을 내거나 직접 일을 해서 국가의 활동에 참여한다.
하지만 고마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해야 하는 걸까?

국가는 좋은 일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처럼 죄 없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기도 하고 이라크전쟁 같은 잘못된 전쟁에 군대를 보내기도 한다. 내 친구들이 사는 평택 대추리만 해도 국가가 주민들과의 대화도 없이 강제로 땅을 뺏으려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국가에 무조건 충성만 해야 할까? 오히려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늘 지켜보면서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엄마도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지적해주고 고칠 수 있도록 함께 도와주는 것이 진짜로 친구를 위하는 길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행위로 보기도 해요.<출처; portland.indymedia.org>

▲ 미국에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행위로 보기도 해요.<출처; portland.indymedia.org>



국기에 대하여~ Bye Bye

만약 아무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난 별 일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에 몸과 마음을 바치기보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다음부터는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기보다는 옆에 있는 친구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