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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적대적 두 국가 앞에서 해방을 기억하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8월 15일이 다가오면 심란했다. 대통령이 내놓는 광복절 경축사 전문도 챙겨보게 됐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과 다를 바 없었던 윤석열의 경축사는 공포스러웠으나,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의 경축사도 께름칙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해방이 그런 것이던가.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정부 성격에 따라 방향이나 강조점이 다르지만 일치하는 역사 인식이 있다. 분단으로 광복은 미완에 멈춰있고 민족이 하나될 때 진정한 광복이 도래한다는 것. 그렇다면 조선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은 미완의 해방에 멈추자는 선언인가. 상임활동가들과 한국현대사 세미나를 하면서 소주제 중 하나로 조선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을 살폈다.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 2023년 말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 발언은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했다. “통일운동에 매진하겠다”며 정계를 은퇴한 임종석(문재인 전 대통령 당시 비서실장)이 “통일하지 말자”며 파란을 일으켰고, 이재명 정부에서도 “평화적 두 국가”를 말하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입장이 정부의 입장이냐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통일 지향을 강조해온 진보운동들에서도 저마다 입장을 정하거나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평화와 통일이 갈등하고 민족과 국가를 질문하게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북의 입장 변화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북미 간 관계를 정상화하려던 2018년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편지에는 “앞으로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는 - 각하와 제가 직접 논의하기를 희망 - 문 대통령이 보이는 과도한 관심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진정성을 담았던 기대가 하노이 회담 결렬로 배신당한 후 북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거나 ‘우리민족끼리’라는 표현을 노동당 규약에서 삭제하는 등 전략의 변화를 드러내왔다. 지난 9월에는 “적대국과 통일을 논한다는 것은 완전한 집착과 집념의 표현일 뿐”이라며 헌법의 개정 가능성도 암시했다. 이런 변화가 제도적 변화로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더 지켜봐야 하지만 구조적 전환은 시작된 셈이다.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두 국가’

199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각각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두 국가’ 관계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물론 남북을 굳이 ‘두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남북이 ‘분단된’ 역사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남북이 서로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 관계”로 이해하자고 약속했다. 탈냉전이라는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남북 각각의 국가 전략이 만나 이른 지점이다.

‘두 국가’이거나 두 개의 국가가 아닌 사이를 오가는 것이 남북 관계였다. 그러니 ‘적대적’이라는 수식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분단 이래 남북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었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화해와 협력이 강조되는 때가 있었을 뿐이다.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은 적대성의 천명이 북에 유리해진 조건을 살펴야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하게는 ‘민족’을 활용해 남으로부터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노골적이거나 유화적인 흡수 통일 의도를 차단하는 것도 필요하며 사회적으로 남의 영향이 확산되는 것도 강하게 우려하고 있다. 하노이 회담 이후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건설과 전략무기 현대화를 통한 정면돌파”를 선언한 북은 러시아와 적극적 관계를 만들어간다. 세계가 신냉전 질서로 변화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진영화를 반대하고 있지만 미국의 패권이 무너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북은 세계가 다극화하고 있다고 인식하며 남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전략을 구사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북의 변화를 강한 비난이나 도발 가능성으로 읽는 것은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방위산업 육성이나 핵무기 보유의 명분으로 삼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접근

통일은 ‘하나의 국가’ 건설을 과업으로 인식시킨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두 개의 국가’는 상상해보지 못한, 납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전세계적인 반제 반식민 투쟁으로 민중의 자결권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였고 분단은 자결권이 훼손된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남북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국가를 만들어왔다.

해방 직후 조선노동당은 “부강한 민주주의적 조선독립국가 건설”을 당의 목적으로 정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은 자신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들어섰다고 규정하며 “북반부에 사회주의를 건설함으로써 민주 기지를 더욱 강화하여 조국의 통일 독립을 촉진”(4월 테제)하려고 했다. 북에서 ‘하나의 국가’는 일제 하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라는 관점에서 추구되었다. 그러나 이후 당 규약의 변화 속에서 남반부에서의 혁명 완수 관점은 점차 희미해졌다. 2021년 조선노동당은 당규약에서 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더욱 강조하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정도의 내용만 남긴다. 통일의 의미가 이미 달라진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한국은 자신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헌법 제3조)로 하고 “통일을 지향”(헌법 제4조)한다는 점을 헌정질서의 주요한 요소로 삼고 있다. 화해와 교류협력을 확장하여 남북연합 단계를 거쳐 통일국가로 나아간다는 방안도 마련한 지 오래다. 그러나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만큼 선명하지 않다.

2023년 민주평화통일국민회의의 여론조사에서 남북의 미래상을 묻는 질문에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2국가’로 답한 사람이 52.0%였다. ‘통일된 단일국가’가 미래상이라 응답한 사람은 28.5%였다. 같은 조사에서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73.7%였는데, 이 집단 안에서도 왕래가 자유로운 2국가를 선호한 이들이 절반에 이른다. 유사한 조사들에서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는 가운데, 통일이 필요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경제 발전과 전쟁 위협의 해소를 꼽으며 통일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비용을 꼽는 점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같은 이유는 그 비중이 매우 적다. 즉 통일이 우리 사회에 경제적 기회가 되는지 부담이 되는지, 사회적 안정이 제고되는지 위협받는지를 놓고 여론이 갈리는데 통일의 상조차 다양한 것이 한국의 상황이다.

해방의 역사는 상상력을 요구한다

통일을 하자거나 말자는 주장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 채로 ‘통일’을 말할 때 윤석열이 그랬던 것처럼 상호 적대를 부추기는 주장이 되기도 순식간이다. 민주당 정부에서 ‘자주국방’을 명분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도 북에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찾아가려면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는 아닐까. 미완의 해방은 무엇이었나. 해방은 어디에서 왜 멈추거나 왜곡되었나.

일제로부터 해방된 때 민중이 통일을 희구했던 것은 민중의 의지와 권력이 실현되는 국가 건설에 대한 기대였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착취당하고 차별당해야 했던 구조를 부수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려는 열망의 발현이었다. 농사 짓는 사람이 땅을 점유하고, 광물과 자원을 공동의 것으로 관리하며 모두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며, 일하는 사람이 마땅한 이익을 균점하는 세상. 남과 북 모두에서, 어쩌면 전 세계의 민중이 바라는 해방이 그것이다.

남과 북의 민중이, ‘민족’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이해하든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라는 점이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통일이 해방의 과정이려면 그 이유를 한민족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두 국가’ 상태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해방의 의미를 영토화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해방이 미완인 것은 분단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남과 북에서,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대만과 오키나와에서, 미국과 중국에서, 인간의 존엄과 평등보다 자본의 이윤과 권력의 안전을 목적으로 삼는 질서가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협하는 국제정세를 넘어설 민중의 힘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통일의 제도화 노력 속에 사라진 해방의 열망을 다시 기억해내고 우리 시대의 전망으로 밝히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식하고 대접하는 훈련부터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상한 사람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해방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갈 민중들이 살아가는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