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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국기에 대한 맹세도, 경례도 강제 안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 논란이 다시금 가열되고 있다. 최근 행정자치부는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한 대한민국국기법의 시행령안을 최근 입법예고하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 조항을 스리슬쩍 끼워넣었다. 지난해 말 국기법 제정 과정에서 국회는 ‘맹세’를 둘러싸고 논란을 거듭하다, 결국 법률에서는 빼되 신중한 과정을 거쳐 시행령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할 것을 정부에 당부했다. 그러나 행자부는 이를 묵살했다. 이대로라면 맹세의 위상은 ‘규정’에서 ‘법령’으로 되레 격상될 전망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폐기처분해야 할 이유는 이미 수없이 지적돼왔다. 박정희 유신체제와 함께 전 국민의 일상으로 파고든 맹세는 국가에 대한 굴종을 강요해온 주문이었다. 일제시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복창하던 황국신민서사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국가의 위엄’이 ‘사람의 존엄’을 호령하며 특정 방향으로 내심의 고백을 강제하는 훈육체계라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다. 논란이 거세지자 행자부는 맹세의 내용을 장차 미래지향적으로 수정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내용을 조금 손본다고 ‘충성 주문’의 강요라는 본질이 바뀌나.

국기에 대한 맹세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주의를 실어나르는 또 다른 수레바퀴는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상징적 몸짓이다. 경례 역시 국가가 ‘건전한 국가관’의 심판자로 군림하며 충성을 강제하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신앙 또는 신념에 따라 국기에 대한 맹세나 경례를 거부해온 이들은 학교와 일터에서 내쫓기고 나라사랑 하자는 데 괜한 까탈을 부린다는 비아냥마저 받아왔다. 반면 미국에서는 1943년 연방대법원 판례를 통해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권을 헌법적 기본권으로 확인한 바 있다. 40년 가까이 학교교육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제해온 필리핀에서도 1994년 이 같은 의례가 양심의 자유와 교육권을 침해한다는 대법 판례가 나왔다 한다.

애국심이나 국기에 대한 경의는 국가가 나서 법으로 강제하거나 훈육할 일이 아니다. 국가주의를 내면화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는 진작 솎아냈어야 할 반인권의 유산이다. 내심의 고백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는 양심의 자유의 일부이기도 하다. 내심의 고백과 서약이 특정 방향으로 버젓이 강제되는 사회에서 사람의 존엄과 권리가 숨쉬긴 힘들다. 국기법 시행령안에 포함된 맹세 조항은 즉각 삭제되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사회적 다원화 속에서 단일한 가치만을 주입하려고 하는 시대착오적 애국정신 함양을 전면에 내세운 국기법 자체도 폐기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