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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시설 장애인에게 자립생활은 '꿈'일 뿐"

인권위, 장애인 생활시설 실태조사 결과 발표

장애인 생활시설 생활인의 인권상황에 대한 첫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2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인생활시설 생활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 발표 토론회를 연 것.

지난해 5월 복지부의 '미신고복지시설 지원 및 관리대책'에 따르면, 2004년과 2005년 정부는 신고시설 전환을 약속한 조건부신고시설 및 신고시설로 전환한 개인운영시설에 대해 복권기금과 삼성재단기금, 하나은행 지원금 등으로 지원사업을 실시했다. 이 결과 지난해 7월 기준으로 미신고 복지시설 1288개 가운데 213개가 신고시설로 전환했고 지원금으로 신축, 증·개축 등 공사가 진행중인 시설이 586개소 등으로 신고시설 전환율이 70%에 이른다고 복지부는 발표했다.

이번 실태조사는 지원사업에 따라 신고완료한 곳과 조사기간 동안 신고를 완료할 것이 거의 확실한 22개 장애인 복지시설의 생활인 가운데 235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8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방문조사 형태로 진행했다. 조사내용에는 생활인의 △입소과정 △의식주 △문화생활 △외부와의 소통 △프라이버시권 등 19개 영역과 함께 시설운영자 설문조사와 시설환경 관찰조사도 포함됐다. 조사팀은 의사소통이 어려운 장애를 가진 사람과의 면접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중요설문 10가지 항목에 대해서는 그림설문지를 제작하기도 했다.


복지시설은 자기결정권의 사각지대

조사결과 시설 입소 과정에서 스스로 입소를 결정한 사람은 22.1%에 지나지 않았고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시설에 들어가거나(18.0%) △본인은 들어오고 싶지 않았으나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강요로 들어간 경우(35.0%) △본인 스스로 결정했으나 실질적으로 가족 등 주변사람들의 설득과 권유가 있어서(24.9%) 등 사실상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입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시설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입소한 경우가 53.5%, 시설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입소한 경우가 14.9%에 달했다.

생활인들은 일상 생활에서도 '집단생활'이라는 이유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인 일정에 맞추어 일과를 스스로 결정하는 경우가 6.5% △언제든지 식사를 할 수 있는 경우는 5.1% △원할 때 자유롭게 목욕할 수 있는 경우가 31% △원하는 종교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경우는 15.3% 등에 불과했다. 이에 더해 일주일에 5회 이상 예배 의식에 참여한다고 응답한 생활인이 68.9%나 됐지만 특정종교를 강요당하는 경우가 23.3%, 꼭 강요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특정종교를 따르는 분위기라고 응답한 경우가 43.3%나 됐다.

생활인 자기결정권 보장 정도 [출처] 실태조사 보고서

▲ 생활인 자기결정권 보장 정도 [출처] 실태조사 보고서



생활인은 시설장 영리추구 수단?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라고 응답한 사람은 35.8%였으나 수급권자인지 모르거나(20.2%) 수급권자가 무엇인지 모른다(34.9%)고 응답한 사람도 절반 이상에 달했다. 시설장을 통해 확인한 실제 수급권자는 76.2%였는데 이 가운데 수급권자인지 모르거나 수급권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54.2%였고 아예 수급권자가 아니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4.2%에 이르렀다. 한편 수급권자에게는 국가가 수급액이나 장애수당을 지급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응답자가 61.3%나 됐다. 또 알고 있지만 어떻게 관리되는지 모르거나(9.4%)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시설에서 관리한다(2.8%)고 응답했다.

한편 수급권자들은 통장 등 자신의 재산을 시설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하거나(42.1%) 누가 관리하는지 모른다(26.8%)고 응답해 시설 측이 수급액을 갈취하고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또 시설 안에서 직업재활이나 농축산업 등 직업활동을 하고 있는 58명도 임금을 받은 적이 없거나(69.0%) 받고 있지만 시설 측에서 일괄관리(17.2%)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임금을 받는 경우에도 액수가 일주일에 5천원이나 한달에 5만원 정도여서 정당한 임금으로 볼 수 없다고 조사팀은 밝혔다.


지역사회와 분리된 외딴 섬

조사대상 시설 22개 가운데 11개는 대중교통을 이용한 접근이 불가능한 곳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아파트 단지(2개)나 일반주택(5개)에 위치한 시설도 있었다. 하지만 상점·음식점·은행·우체국·공중전화 등 지역사회에 있는 편의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한다고 답한 사람은 6.8%에 불과했고 '주변에 이용할 것이 없다'(32.4%),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29.7%), '알고는 있으나 이용해 본 적이 없다'(19.2%) 등의 응답이 대부분이어서 생활인들이 지역사회와 교류 없이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외출을 하지 않거나 시설 측이 외출을 못하게 하는 이유로는 '장애로 인해 이동하기 어렵다'(12.0%)보다 '시설에서 못 나가게 한다'(67.4%)는 응답이 월등하게 많았다. 응답자의 59.0%는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거나 거의 교류가 없다고 답했다. 또 가족이나 친지, 친구가 방문한 적도 없는 생활인이 40.8%에 달했다. 조사팀은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교류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한 상황은 사회적 관계 맺기를 더욱 어렵게 하며 이는 시설장애인이 서서히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는 조건"이라고 지적했다.

편지나 전화를 통한 소통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의 40.6%는 편지를 쓰지도 받지도 못한다고 답했고 29.9%는 전화를 받거나 걸 수 없다고 답했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비율도 8.1%에 불과해 전국민의 80%에 달하는 이동통신 가입자 비율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시설은 '자립생활'의 적

설문 응답자의 입소기간은 5년이상 입소자가 54.9%로 절반이 넘었고 15년 이상 입소자도 6.8%에 이르렀다. 이는 시설 측에서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집계돼 생활인이 시설을 옮긴 경우 이전 시설에서 생활했던 기간은 포함되지 않아 실제로는 더 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장기입소자가 많은데도 "퇴소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원한다'(50.7%)는 응답만큼이나 '원하지 않는다'(43.0%)는 응답도 많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퇴소를 원하지 않는 이유로 △나가봐야 가족도 없고 반겨줄 사람도 없다(26.8%) △나가고 싶으나 장애나 빈곤 등으로 독립할 기반이 없다(22.0%)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보제공 부족) 생각해 보지 못했다(16.5%) 등이 지적돼 생활인 대부분이 자립생활의 여건만 갖춰지면 퇴소를 원할 것으로 드러났다. 한 응답자는 "15년동안 이곳에 있었고 이젠 너무 익숙해서 나가기가 겁이 난다"고 답했다.

발표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시설생활인 김 아무개 씨는 "보호받으며 평생 사는 것보다 하루 한 끼를 먹고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기를 소망한다"며 "어렵더라도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시설생활을 한 김 씨는 이달 말 월세방을 구해 자립생활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설생활인들은 법인 전환과정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조사대상 시설 22개 가운데 일부는 법인으로 전환했거나 전환 과정에 있었는데 전환 전에는 생활인들이 개인통장으로 수급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전환 후에는 개인수급이 중지되고 시설운영비로 지원되는 것. 이에 따라 법인 전환 전에는 개인이 수급액을 관리하면서 개인물품을 구입하거나 자립자금을 저축할 수 있었지만 전환 후에는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조사팀은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가능한 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자유로운 생활범위가 달라질 뿐 아니라, 개인의 자존감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한편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생활인들의 거주지가 반드시 시설 주소지로 등록되어야 하므로 영구임대주택 등의 신청자격이 박탈되는 것도 문제. 조사팀은 "법인신고시설로 전환하여 일부 시설환경을 개선하고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었으나, 시설생활인의 궁극적 목표인 자립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진 셈"이라고 비판했다.


시설지원 정책에서 자립생활지원 정책으로

조사팀은 "전문적인 치료와 요양 목적의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설은 수용시설을 지양하고,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 지원을 해주는 서비스 이용시설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며 △노동권의 확보와 장애연금제도의 도입 △자립생활 거주기반 마련을 위한 임대아파트 입주조건 완화와 전세자금 대여 확대 △자립생활홈·그룹홈·전문요양쉼터 등 선택가능한 주거서비스 다양화 △활동보조인 제도화 △성년후견제 마련 △기존 생활시설의 소규모화와 자립생활 지원기능 의무화 등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