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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불법 불심검문 관행에 맞선 한 시민의 승리

서울남부지법 "100만원 배상하라"

회사원 윤종원 씨는 지난해 4월 13일 밤 9시 15분 서울 국철1호선 가리봉역(현 가산디지털단지역) 2층 매표소 앞 개찰구를 통과해 대합실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탈주범·수배자 검거를 위한 일제검문검색을 하고 있던 서울남부경찰서 소속 황 아무개 순경은 윤 씨에게 소속·계급·성명과 함께 수배자 검거를 위한 일제검문 중임을 말하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하지만 윤 씨는 자신이 현행범이나 수배용의자가 아니므로 협조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주위에 있던 같은경찰서 소속 임 아무개 경사와 최 아무개 경장은 "사회가 유지되려면 선량한 시민들이 협조를 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빨리 신분증 제시하세요"라며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뭔가 죄지은게 있으니까..."

윤 씨가 집에 가겠다며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고 통로쪽으로 나아가자 경찰들은 윤 씨를 따라가 가로막고 "뭔가 죄지은게 있으니까 검문에 불응하는 것 아닙니까, 협조를 해주셔야죠", "파출소에 신분확인하러 가시죠, 순찰차가 대기하고 있거든요"라며 20여분 동안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윤 씨는 다른 전철 이용객들이 보는 앞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고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신분증을 제시했다. 경찰들이 그 자리에서 신원조회기로 조회해 수배사항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윤 씨는 귀가할 수 있었다.

윤 씨는 불심검문을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1997년 불심검문 거부로 연행됐다 피해배상 판결을 받은 사람을 소개한 언론보도를 본 이후로는 거부해 왔다. 윤 씨는 "보통 거부하면 경찰들이 순순히 물러섰는데 이번에는 현장에서 억류까지 당하고 보니 아직도 불심검문이 근절되지 않았구나 싶어 확실하게 없애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음날 윤 씨는 남부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자신이 당한 사연을 올렸다. 그러자 남부서 청문감사관실에서 내용이 심각하다며 조사에 응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조사결과 '적법한 공무집행이어서 불문에 처함'이라는 결과를 내놨다. "'제식구 감싸기'라는 생각이 들어 재판밖에는 없구나 싶었다"는 윤 씨는 같은달 국가를 상대로 4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초기 한 경찰로부터 "서로 귀찮게하지 말자"면서 소송을 취하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윤 씨는 "사과 한마디라도 했으면 소송을 취하했을텐데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사과도 없어 취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털어놨다. 윤 씨는 검문 당시 휴대전화 카메라로 경찰들을 촬영했고, 사건 현장 근처에 폐쇄회로텔레비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철도공사에 녹화분을 보존해 줄 것을 요청한 후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결국 9달 동안의 공방 끝에 지난 17일 서울남부지법 민사34단독 왕정옥 판사는 "(경찰관들이)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배하여 원고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였다"며 국가가 윤 씨에게 위자료 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제검문은 위법"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는 "수상한 거동 기타 주위의 사정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자 또는 이미 행하여진 범죄나 행하여지려고 하는 범죄행위에 관하여 그 사실을 안다고 인정되는 자"를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재판부는 "'수상한 거동'이라 함은 비정상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한 언어·동작·태도·복장·모습 등 보통인과 다른 것을 말하고 이는 인적·시간적·장소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검문대상자 판단은 "경찰관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이어야 하고 구체성이 없는 예감이나 일반적인 의심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이러한 요건을 갖추지 않은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일제검문을 행하는 것은 그 법률상 근거가 없으므로 허용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신분증 요구에 응할 의무 없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는 경찰이 불심검문에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다만 주민등록법 제17조의10 제1항에 "범인의 체포등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17세 이상인 주민의 신원 또는 가족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경우" 주민증의 제시를 요구할 수 있다. 이때 제시하지 않고 다른 신원증명 증표 등으로 신원이나 거주관계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하여" 인근 관계관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경찰관직무집행법의 취지로 볼 때, "피검문자에게는 신분증 제시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고 단순히 불심검문에서 신분증 제시를 거부한 것만으로는 경찰서 등에 동행하여 신원을 밝힐 것을 요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불심검문 질문, 답하지 않아도 된다"

경찰관은 검문 장소에서 질문하는 것이 "당해인에게 불리하거나 교통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경찰서 등에 동행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피검문자는 동행요구를 거절할 수 있고, 의사에 반해 답변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재판부는 "명백히 답변을 거부하는 자를 추격하여 답변을 강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며 경찰관들이 "원고가 신분증 제시요구에 불응하는 의사를 명백히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수인의무가 없는 원고를 가로막고 20여분 가량 귀가하지 못하게 하고 계속 검문하거나 파출소에 연행할 뜻을 보이는 등으로 사실상 신분증 제시를 강요하고 원고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였다"고 판단했다.


"경찰관이 먼저 신분증 제시해야"

윤 씨는 소송을 제기할 때 가해 경찰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정복을 입었지만 '엑스반도'를 하고 있어 명찰이 보이지 않았던 것. 다만 신분증을 돌려받으면서 경찰들에게 소속이 어디인지 물었더니 독산지구대라고 답한 것이 기억났다. 남부서 청문감사관실에서 조사받으면서 적극 가담한 3명의 명단을 받고서야 자신을 검문한 경찰이 누구인지 알았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재판부는 "경찰관이 불심검문시 경찰관 정복을 입고 있는 경우에도…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를 제시할 의무를 면할 수는 없다"며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는 경찰관의 공무원증"이라고 못박았다.


근절되지 않는 불심검문 관행

인권단체들의 문제제기로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불심검문 관행은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하철역, 주택가, 대로변 등에서 불심검문은 여전하다. 시민들은 불심검문에 굳이 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문제제기하면 더 귀찮을 것 같아 신분증을 보여주고 만다. 2000년 2월 형사정책연구원이 낸 『불심검문의 실태와 개선방안』에 따르면 직장인과 대학생 497명을 실태조사한 결과, 불심검문에 협조한 이유로 55.9%가 "경찰과 실랑이를 하기 귀찮아서"를 들었고, 비협조적이었던 이유로는 응답자의 44.3%가 "절차를 무시한 불법 부당한 불심검문이어서"라고 답했다.

윤 씨는 "불법 불심검문임을 알면서도 실랑이 벌이기 싫어서, 소송하기 귀찮아서 문제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며 "시민들이 귀찮더라도 강력하게 대응해야 불법적인 관행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변 노동위원회 권영국 변호사는 "법률에는 경찰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와 동행요구를 거부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만 불심검문 관행에는 권위주의적 행태가 남아 있다"며 "법에 따른 집행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운영상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도록 시민들도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판을 통해 권리를 구제받는 것이 힘겨운 것도 불심검문 관행이 여전한 이유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배상액도 너무 낮아 승소하더라도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 이번 재판에서 국가가 항소를 포기해 손해배상액이 확정되더라도 윤 씨가 받을 수 있는 배상액은 이자까지 합쳐 100만원 남짓이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변호사 없이 홀로 준비서면 등 재판관련 서류를 준비하며 소송을 진행한 윤 씨가 입은 피해는 막심하다. 약 10만원인 인지대 등 소송비용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일일이 회사에 양해를 구해야 했고 오전에 재판이 있을 때는 지각으로 처리됐다. 이번 판결에 따라 소송비용의 3/4도 윤 씨가 부담해야 한다. 권 변호사는 "법원이 판결을 통해 벌금이나 손해배상 액수를 높여 공무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불법을 저지른 경찰관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힘든 것도 문제이다. 경찰관직무집행법 제12조는 "이 법에 규정된 경찰관의 의무에 위반하거나 직권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불심검문 피해자들은 대부분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권 변호사는 "형사고소를 하게 되면 경찰이 경찰을 수사하게 되어 피해자의 주장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며 "경찰 자신들의 일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선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불법 불심검문 관행은 없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