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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민주주의' 없는 '주민투표'

이른바 '국책사업'으로서는 최초로 방폐장 부지선정과 관련한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결과 경주시가 투표율 70.8%에 찬성률 89.5%를 기록하며 최종후보지로 선정됐다. 선정지가 확정된 후 이희범 산업자원부장관은 '부지선정 사업을 추진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제고했으며… 진정한 주민자치의 실현과 갈등해결의 모범적 선례를 남겼으며… 지방자치 10년 풀뿌리 민주주의의가 정착됐다…'고 자평했다. 과연 그런가? 주민투표를 앞두고, 유치신청을 낸 곳에서 벌어진 불법과 부정, 관권 개입을 증거 하는 숫한 자료와 증언은 우리에게 '민주주의' 없는 '주민투표'의 실상을 확인케 했다.

무엇보다, 현행 주민투표제는 진정한 민의를 수렴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그릇이 될 수 없다. 주민투표제는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의 중요한 결정을 주민들이 투표라는 방식을 통해 참여하는 제도이다. 그럼에도 현행 주민투표제는 '청구절차와 대상'을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사실상 직접민주주의를 봉쇄하고 있다. 우선, 청구절차 면에서 현행 주민투표법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장에게는 큰 문이지만, 지역주민에게는 좁은 문이다. 중앙정부의 장은 언제든지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지만, 주민들은 주민투표의 실시를 청구하기 위해서 전체 유권자의 5분의 1에서 20분의 1사이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2004년 7월 주민투표법이 실시된 이후 주민들의 청구에 의해 주민투표가 실시된 사례가 단 한차례도 없다는 점은 주민발의를 제한하고 있는 현행 주민투표법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구조적인 한계로 지역주민들은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가 발의한 의제 즉 방폐장 부지선정에 대해 단지 '찬성과 반대' 만을 표현을 할 뿐 근원적으로 대안적인 에너지정책 전반에 대한 여론화나 의견표명은 드러낼 수 없다. 법으로 형식을 만들어 놓았으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민주주의는 실종된 것이다. 그 자리에 위로부터의 강제된 민주주의를 통해 정부는 주민들에게 그들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여기에 지역개발과 이권이라는 '당근'이 지역간 경쟁을 부추겨 지역감정까지 노골화됐다.

이번 방폐장 주민투표에서 드러난 또 다른 문제는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감독해야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서 '찬성' 중심의 선거운동을 사실상 벌였다는 데 있다. 중립을 지키기는커녕 '개입'을 노골화한 처사에 대해서는 결과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부재자 신고를 이용한 부정투표 의혹은 일찍이 제기되어 왔다. 10.26 보궐선거에서 부재자 투표율이 2%를 넘지 못했던 것에 비해, 이번 주민투표에서 부재자 신고율은 군산 39.36%, 경주 38.13%, 영덕 27.46% 포항 21,97%나 된다. 게다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찬성론자에게만 쓰여 지고, 지방자치단체장이 머리까지 깎으며 유치호소에 나서는 등 관권 선거를 보여주는 증후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지겹다.

이번 방폐장 주민투표 과정은, 한마디로 경제적 이해와 개발논리·경쟁을 '법에 의한 지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로 합리화 한 것이다. 주요 정책의제를 주민투표로 제안할 주민들의 민의는 배제되고, 주민은 단지 찬반투표를 찍는 거수기로 전락됐다. 거수기로서의 참여는 있지만,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참정권은 실종된 것이다. 동의와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작은 단위로부터의 광범위한 대화와 토론,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 대신 일방적인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합리적 설득과 토론의 자리에 지역감정과 경쟁을 부추기는 구호가 자리하는 한 주민들의 권한강화를 통한 민주주의는 뿌리 내릴 수 없다. 주민투표의 대상이 넓어지고, 주민의 발의권이 실제화 되며, 공정한 선거를 이룰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지 않는 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환상과 허구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