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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잊혀진 존재, '사회 속 양심수'에게 자유를!

한총련 정치수배 조건없이 해제해야

해방60돌을 맞아 대규모 사면조치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잊혀진 존재'였던 한총련 수배자들에 대한 사면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국 325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2일 오후 1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8·15 특별사면에서 모든 양심수를 석방·복권시키는 것은 물론 한총련 정치수배자들에 대해 조건없는 수배해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난달 26일부터 이곳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벌여온 우대식 씨(2003년 11기 한총련 대변인)를 비롯한 5명의 수배자들과 수배자 가족, 각계 인사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소속 단체 대표들과 수배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소속 단체 대표들과 수배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저들을 가둬두고, 불의한 상태에 방치해 두고…"

수배 6년차를 맞은 김미연 씨(2000년 경기대 총학생회장)의 어머니 유귀자 씨는 "수배해제를 요구하는 자리가 오늘이 부디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며 "남북이 오가는 시대에 왜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묶어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권오헌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회장도 "한총련이 사실상 합법화된 이 때, 창살없는 감옥에 유배된 채 살고 있는 수배자들에 대한 수배해제 조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현 13기 한총련에 대해서는 공안당국의 수배·기소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 송효원 의장(홍익대 총학생회장)의 경우 통일부 승인을 받고 지난 5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대학생 상봉 모임과 지난 6월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하는 등 2차례나 방북한 바 있다.

정진우 NCC 평화통일위원은 "정치수배 해제는 49명의 수배자와 고통받는 가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저들을 가둬두고 우리 역사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으며, 저들을 불의한 상태에 방치해두고 우리가 어찌 인간의 얼굴을 하고 다닐 수 있겠냐"며 "이번 사면을 기해 지금까지의 부끄러움을 씻지 못한다면 그 죄값은 청와대에 돌아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푸른색 수의를 입은 수배자와 가족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찜통더위보다 이들의 심정이 더 타들어가는 듯하다.

▲ 푸른색 수의를 입은 수배자와 가족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찜통더위보다 이들의 심정이 더 타들어가는 듯하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들은 범청학련 소속 통일선봉대 학생 4백여명이 합류한 가운데 광화문우체국 근처까지 수배해제를 촉구하는 거리 행진을 이어나갔다. 행진이 끝난 뒤 대표단 4명은 청와대를 방문해 각계에서 받은 1차 수배해제 탄원서를 전달했다. 수배자 5인은 이후 농성장을 여의도 민주노동당사로 옮겨 오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나가는 한편, 법무부 장관 면담과 815인 탄원서 2차 모집 등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양심 지키려 수배자로 남은 사람들

현재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인 한총련 정치수배자 수는 총 49명.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 24명은 4년 이상 장기 수배 상태에 놓여있다. 쫓기는 몸이 된 지 무려 8년째나 되는 최장기 수배자도 2명이나 포함돼 있다. 대부분은 노무현 정부 집권 1년차에 이뤄졌던 한총련 수배자 '7·25 사면조치'에서 불구속수사 대상에서 배제됐던 이들이거나 당시 한총련 집행부를 맡고 있다 '7·25 사면조치' 이후 추가로 수배된 11기 대의원들이다.

2003년 7월 25일 대검 공안부는 기존 수배 또는 내사 대상자 152명(5기∼10기) 가운데 부총학생회장 또는 단과대 학생회장급 당연직 대의원으로서 다른 형사법 위반 사실이 없는 79명만을 '불구속 수사'키로 하고, 한총련 의장과 지역총련 의장, 총학생회장 등 중앙위원 이상 핵심 간부에 해당하는 나머지 73명에 대해서는 '자수'하고 '반성'할 경우 불구속 수사 등 '최대한의 관용 조처'를 취한다는 '선별 사면' 방침을 발표, 인권단체들로부터 거센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반성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자수 요구 자체가 양심을 꺾는 행위라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 자진 출두한 당연직 대의원들마저 사실상 '전향서'나 '반성문'과 다름없는 각서 작성을 요구받았고, 유영업 씨등 자진 출두한 핵심 간부들이 출두하자마자 구속되는 일이 잇따랐다. 당시 11기 대의원에 대해서도 '일괄 수배' 관행을 폐기하기로 발표했지만, 핵심 간부들에 대한 소환·수배 방침은 고수됐다. 이에 따라 많은 수배자들이 '반성'을 강요하는 권력에 맞서 양심을 지켜내기 위해 수배자의 멍에를 계속 짊어지는 길을 택해야 했다.


쫓기는 삶, 망가진 몸과 마음

쫓기는 삶은 수배자들의 몸과 정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대부분의 수배자들이 협심증, 부정맥, 만성 위장장애 등 한두 가지 질병을 갖고 있다. 제대로 진료를 받을 수 없다 보니 병을 알고도 되레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날 거리 행진 참가자들은 감옥모형을 들고 나와 수배자들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 이날 거리 행진 참가자들은 감옥모형을 들고 나와 수배자들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수배 3년째를 맞은 김현주(2003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11기 대의원) 씨는 수배 이후 "간질일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권유받았지만, 엄두도 못내고 있다. 같은 기수 대의원인 이영훈(2003년 한신대 총학생회장) 씨는 부정맥, 협심증을 앓아 호흡곤란과 쇼크로 여러 차례 쓰러져도 쫓기는 몸이라 불안한 숨을 내쉬고 있다. 수배 5년차인 박요섭(2001년 단국대 자주대오 사건) 씨는 전정신경염(회전성 어지럼증)으로 2∼3일에 한번씩 구토를 동반한 어지럼증이 찾아오지만, 지난해 입원치료를 받던 중 연행될 뻔한 적까지 있어 치료를 받으려면 연행을 감수해야 할 형편이다.

그밖에도 대부분의 수배자들은 불안한 장소에서 잠을 청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주민등록이 말소돼 건강보험 혜택까지 받지 못하는 일까지 겪어야 한다. 모든 관계 속에서 자신이 사라진 듯한 고립감이 따라다닌다. 이 같은 사실은 2003년 7월 민가협이 수배자 30명을 대면조사해 발표한 수배자 인권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조건없는 수배해제, 낙관하긴 힘들다

수배해제와 관련해 일단 여당과 청와대쪽 기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은 2일 <민중의소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수배해제에 대해) "전향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열린우리당에서도 지난달 29일 여당의원 15명이 한총련 구속·수배자 사면을 건의한 데 이어 지난 1일 열린우리당 상임위원회에서도 사면 건의 대상에 이들을 포함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사면이 이뤄지더라도 '조건 없는' 수배해제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2일 황필규 NCC 인권위원장 등 대표단 4명으로부터 탄원서를 전달받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김택수 비서관은 "수배를 풀고 가는 걸 원칙적인 입장으로 갖고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수배자들이 최소한의 법적 절차는 밟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지난 '7·25 조치'를 비롯한 역대 정권의 사면조치에서처럼 또다시 '반성'을 강요할 위험이 있다.

12기 한총련 대의원의 경우 지금까지 이적단체 구성·가입(국가보안법 7조 3항) 위반으로 사법처리된 사람은 조선대 백용현 씨를 포함해 모두 4명이다. 과거와 달리 불구속수사가 이뤄지고 집행유예 등 이례적인 판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민가협에 따르면, 대부분은 수사과정에서 반성문과 유사한 각서를 여전히 요구받고 있다. 검찰 공안부의 한총련에 대한 인식이 여전한 탓이다.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의 반발이 커지면서 전향의 다른 이름인 '반성'이 전제조건으로 제시될 가능성도 있다. 이미 <문화일보>는 2일자 사설을 통해 여당이 한총련과 같은 '반국가 사범' 사면 건의 방침을 정한 것은 "국기(國基)를 흔드는 일"이며 "반국가 사범이 활보한다면 국보법은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X파일 파문'으로 내부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는 보수신문들과 한나라당이 사면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반대 공세에 가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8·15 사면 대상은 내주 초 결정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 사면이 한 인간과 학생자치단체를 폭력과 공포 앞에 무릎 꿇려온 정치수배와 기만적 '선별 사면'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