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움틈] '직장내 성희롱 피해', 산업재해로 보자

'산업재해'와 '산업안전' 개념의 여성주의적 확장 필요

"신념이나 확신의 저조, 불안, 두려움, 공포, 분노, 수치심, 신경증, 우울증, 불면증, 자존심 손상" 직장내 성희롱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은 이러한 고통을 공통적으로 호소한다. 많은 피해자들이 사고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괴롭히는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성희롱을 말 그대로 가벼운 '희롱'이나 개인의 수치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희롱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적극적으로 해결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피해 여성들은 직장내 성희롱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비난이나 보복성 인사조치 등으로 인한 괴롭힘으로 인해 회사를 다니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 쉽다. 이러한 피해가 개인이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겨지고 있는 현실이 과연 정당한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직장내 성희롱 문제를 다룬 영화 <재희 이야기>의 한 장면

▲ 직장내 성희롱 문제를 다룬 영화 <재희 이야기>의 한 장면



직장내 성희롱도 '산업재해'로 봐야

직장내 성희롱은 '직장'이라는 고용환경 안에서 발생한 사고, 즉 업무상 사유에 의한 사고이다. 이로 인한 후유증과 고통은 여성이 노동을 수행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궁극적으로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유해한 작업환경을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제4조 1항)에서 '산업재해'란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의미한다. 이 의미로 보자면 직장내 성희롱 피해 역시 "업무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근로자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상당한 것"이므로 당연히 산업재해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산업재해보상제도에 의해 보상받은 경우는 지난 2000년 부산 새마을금고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 의한 신체 상해에 대해 보상한 단 1건뿐이다.

현재 직장내 성희롱 피해를 산업재해로 보고 이에 대해 피해 구제를 하기 어려운 이유는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제정된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관련 제도는 건설, 제조업의 2차 산업 중심의 산업화에 맞춰 '굴뚝 산업'에서 발생한 사고나 질병에 대한 노동자 보호 및 피해 구제를 목적으로 해왔다. 산업재해 보상과 예방이 주로 이러한 노동환경에서 발생하는 추락, 절단 등의 심각하고 가시적인 피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산업재해에 대한 일반 노동자의 인식은 "크게 다치거나 절단되지 않으면 산재 신청을 하기 어렵다"는 사회적 통념을 만들었다. 최근까지도 전체 산업재해 보상의 70% 이상이 건설, 제조업에서 발생한 사고 및 질병에 해당한다.


'굴뚝재해' 중심의 산업재해 개념 넘어서야

'굴뚝재해' 중심으로 산업재해를 인식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무직 노동자의 문서작업, 상사나 동료, 고객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과중 노동의 부담, 오랜 작업에서 오는 질병 등은 사실상 산업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피해 구제가 어렵다. 점차 3차 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노동과정에서 업무에 의한 대인관계가 늘어나는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문제들을 산업재해로 인식하고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단순하위 사무직, 판매·서비스직에 집중돼 있고 남성의 직위나 성별 등에 의한 폭언, 폭행, 성폭력과 같은 성차별적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위험 문제는 노동자의 산업재해 예방과 안전 문제에서 간과돼 왔다. 그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환경에서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실제로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지에 대한 현실은 거의 질문된 적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주요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성희롱 피해의 치유받을 권리 보장해야

1990년대 캐나다에서 여성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강 문제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스트레스, 우울증과 불안, 직장내 성희롱과 성폭력 등을 꼽은 바 있다.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이미 성희롱 피해자들이 고통받는 정신적, 신체적 증상을 "성희롱 증후군(sexual harassment syndrome)"이라 하여, 장기간 성희롱으로 고통받는 피해자의 심리적 증상과 신체적 질병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의학적인 연구뿐 아니라 치료, 치유 등 피해자가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 구제 방안을 고민하는 추세이다.

예를 들어, 피해 노동자에게 후속적인 카운슬링(상담)이나 치료를 지원하거나, 성희롱, 성폭력의 정신적 피해로 가장 많이 알려진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의 경우, 장기적인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의료적 지원, 법적 조언이나 소송, 산재보상, 상담, 동료들의 지원 프로그램과 같은 실질적인 구제 방법이 제안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연방정부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성희롱 문제로 치른 경제적 비용 2억 6천 7백만불 중에서 약 10분의 1인 2천 6백만불을 병가 등 성희롱 이후의 정신적, 심리적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직장내 성희롱도 산업재해로 인정한 캐나다

직장내 성희롱으로 인한 정신적 손해도 산업재해 보상 범위 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캐나다의 경우, 아랫사람, 동료, 상사에 의한 지속적인 성희롱으로 인한 피해뿐 아니라, 직장내 성희롱 가해자로 오인되어 조사과정에서 받았던 고통에 대해서도 산재보상보험을 적용한 사례가 있다. 직장내 성희롱으로 산재보상을 받기 시작하면서 캐나다에서 성희롱은 차별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직무 스트레스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렇듯 산업재해에 대한 개념을 여성노동자들의 실질적인 피해 경험에 맞춰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가능한 피해 구제 범위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실질적인 권리로서의 피해 구제가 가능해진다.


여성노동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운동으로

직장내 성희롱이 고용상의 성차별로서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 왔듯, 그 피해 역시 노동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서 적절한 피해 구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현행법상으로도 충분히 직장내 성희롱 피해는 산업재해로 볼 수 있지만 실질적인 보상과 관련해서 피해 구제 사례는 거의 드물다. 따라서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의 확장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이 검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성희롱,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대다수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산업안전'의 문제로 접근하여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찾아갈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해왔던 기계적 수치나 화학약품 검사 등의 물리적 조건에 치중한 안전한 노동환경 만들기 방식을 넘어 '산업안전'을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성차별적인 위험들을 예방, 제거해나갈 수 있는 의미로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는 그동안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산업안전 정책이 성편향적으로 작동하여 여성노동자의 재해를 예방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여 문제를 지속시켜온 실질적인 차별을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존의 노동건강에 대한 관심 내에서 여성노동자의 실질적인 건강 문제로서 성희롱, 성폭력의 사안이 시급하고 중요할 수 있다는 인식이 마련되어야 한다. 캐나다에서 직장내 성희롱을 산재보상 받은 사례가 또 하나의 여성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듯이, 새로운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움직임은 중요하다.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산업재해보상을 집단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실질적인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한 운동을 시작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지금까지 제기되어 오지 않았던 문제를 공론화하고 산업안전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최이윤정 님은 석사논문으로 「'산업재해'로서의 직장내 성희롱에 관한 연구」(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 2004)를 썼고, 현재 '또하나의문화'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