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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즐거운 물구나무] '신원 진술' 강요하는 학교

젊은이들의 실업난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요즘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는 그야말로 주종 관계와 다름없다. 하늘같은 고용주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버린 고용인은 예의의 차원을 넘어 눈치를 살피며 비굴해질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인권 침해를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는 없는 법.

11월 중순이 되면 여기저기 사립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구한다는 공고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다. 올 해 사범대를 졸업하고, 예비교사들의 힘겨운 구직 경쟁에 뛰어든 나는 우선 여러 필요한 서류들을 잔뜩 준비했다. 인터넷으로 못하는 게 없다는 최첨단 시대에 우편 접수를 고집하는 학교에 대한 답답함도 잠시 한 학교의 구인공고를 보고 벌컥 짜증이 났다. 교사로서 자격과 자질에 관한 서류 외에 주민등록 등·초본, 호적 등본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 설사 임용이 결정된 후 행정처리를 위해 필요해도 선뜻 내어줄 만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운데 서류전형부터 이런 서류를 요구하다니. 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정보통제권이란 게 있다고 구시렁대며 동사무소로 향했다.

간혹 어떤 학교에서는 자체 제작한 지원서를 요구하는데 대개 이런 지원서에는 키, 몸무게, 혈액형, 종교 등의 개인 정보를 묻는 질문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동거 여부 및 가족의 학력, 직업을 묻는 질문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재산까지 묻는 학교도 있었다. "에잇, 이놈의 학교 안가고 만다"라고 포기해 버리려다 문득 일반 회사에 지원해도 똑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한숨을 내쉬며 쪼그리고 앉아 빈칸을 채웠다.

저녁이 되자 영어 면접을 위해 등록한 영어회화 학원으로 향했다. 우연히 구직 이야기가 나와 이런 고충을 말하자 미국인 강사는 눈이 동그래져 "오! 노∼"를 연발했다. 미국에선 지원서에 외모나 인종에 관한 어떤 정보도 물을 수 없고 사진도 붙일 수 없다며 단호히 말한다. "고소하세요!" 그래, 바로 그거야! 갑자기 피가 끓었다.

그 동안 수 십 통의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던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건 어느 학교에서도 빠지지 않는 '전교조 가입 가능성 탐색 질문'이다. 무조건 "전교조에 반대한다"고 답해야 함은 물론이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가장 쉬운 것일 수 있으나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이미 하나의 입장이 정답으로 강요되고 있는 이런 현실에서는 설사 전교조를 반대하는 사람이라 해도 대답할 때 불쾌한 기분이 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머리 속의 사상을 꺼내놓으라는 것이 옷 속의 내 몸을 드러내 보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지?" 속으로 외치며 나는 외워버린 정답을 줄줄 주워섬겼다. 집으로 가는 길, 신문을 뒤적이다 '사상 검증'이란 말을 발견한 내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드디어 어느 '눈 먼' 학교로부터 임용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기분좋게 냉큼 달려간 나에게 학교 행정실에서 내민 것은 난생 처음 보는 '민간인 신원 진술서'. 이건 또 무어냐? 살벌한 이름에 살짝 주눅 든 나에게 행정실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신원 조회를 위해 필요한 서류에요. 신원 조회가 먼저 끝나야 다른 행정 절차를 진행할 수 있거든요" 학교를 나오는 데 머리 속이 복잡했다. 민간인 신원 진술서에는 '본적' 뿐 아니라 들어 본 적도 없는 '원적'을 적는 란도 있다. 또 종교, 혈액형, 신장, 체중, 유전병, 심지어 특기, 취미에 외국어 능력을 상중하로 적는 란까지 있는데 이런 것이 신원 조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도통 알 수 가 없다. 또한 '정당 및 사회단체 관계'에 대한 질문도 6개나 되고 △북한 및 해외거주 가족관계 △8.15이후 거주지 △해외여행의 기간·여행국·목적까지 기입하도록 하고 있다. 심지어는 공산당에 관련된 좌익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 여부도 묻는다.

무엇보다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신원 조회'라는 말이다. "신원 조회를 왜 하느냐?"고 물어도 행정실에서는 "꼭 해야 돼요"라는 생뚱맞은 대답뿐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내용을 적는 것이 신원 확인을 위한 방법인지도 의문이다. 신원 조회의 악용 내지 남용 여부를 따지기 전에 국가 및 기업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왜 개인의 신원을 조회하는지, 취업 시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에 기입하도록 강요하는 개인정보가 과연 '신원증명'이라는 목적범위에 맞는지 묻고 싶다. 사상검증에, 재산보유까지 도대체 이런 정보가 신원 확인으로 필요한가? 또한 정보수집 과정에서 개인에게는 신원 조회의 사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실업난이라는 지금, 경제 불황이라는 한파에 '인권' 어쩌고 하는 말들은 모조리 바짝 얼어붙어 버렸다.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무슨 고상한 권리를 따지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인권은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인권은 그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권리가 얼음 속에 갇히기 전에 어서 빨리 해동시키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