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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하루소식 '그때 그 사건' ⑤ 부랑인 수용시설 '양지마을' 사건

육지 위의 노예섬, '양지마을'은 진행형

5년 전인 1998년 7월 16일 아침, 인권운동사랑방 등 인권단체 활동가들과 이성재 국회의원 등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은 취재진과 함께 충남 연기군에 자리한 부랑인 수용시설 '양지마을'에 들이닥쳤다. 인권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사회복지시설의 인권유린, 비리 문제를 제보받아 긴급 현장조사에 들어갔던 것이다.


창살 잡고 울부짖던 그들

한 번 잡혀가면 '개미고개'라는 공동묘지로 주검이 되어 나올 때까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그곳에서 400명이 넘는 '노예'들은 폭력에 시달리며 한달 1만원 안팎의 푼돈을 월급이라고 받으며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원생들은 "지옥 같은 곳에서 나오겠다"며 "차라리 감옥으로 가는 게 낫다"고 창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그날 1차로 23명의 원생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일주일 뒤에는 원생들이 자발적으로 농성을 하면서 양지마을의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제쳤다.

그후 그들은 그곳에서 일한 대가로 통장에 남아 있던 십여 만 원에서 백여 만 원의 저축금을 울분과 술로 탕진한 뒤 뿔뿔이 흩어졌다. 수용시설이 지긋지긋하다며 굶어죽어도 자유롭게 살다 죽겠다던 사람들은 노숙자가 되었고, 화병에 제 몸 하나 돌보지 않았던 이들은 하나둘 죽어갔다. 그들 중 소수만이 연락이 끊겨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역전에서의 강제납치 이후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감옥 같은 곳에서의 강제노역과 철저하게 짜여진 폭력구조 속에서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6년까지 신음하던 그들은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당시는 IMF 위기로 실업자가 넘쳐나던 때였으므로 그들에게 월급 적은 직장이라도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경비직을 하는 김아무개 씨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들에게 돌아오는 일거리는 기껏해야 노가다나 일용잡직뿐이었다. 김씨는 "우리는 양지마을에서 청춘도, 가족도 모두 잃었다. 우리의 인생은 양지마을과 노재중(당시 이사장)에게 모두 빼앗겼다"며 지금도 울분을 삭이지 못한다.


가벼운 처벌, 껌값 배상금

양지마을 출소 원생 33명은 민변의 도움으로 그해 8월 노재중 이사장, 박종구 원장 등을 특수감금과 특수강도, 상해치사, 상해치상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특수감금, 특수강도 부분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았고, 인권단체들에서 주장한 암매장 의혹이나 성폭행 부분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하지 않았다. 법원은 단순히 폭행과 노역비 착취와 국고보조금의 횡령 등의 죄만 인정해 노재중 이사장에게 3년형을 선고했다.

사건 발생 1년 뒤, 양지마을 출소 원생 22명은 다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국가의 관리감독이 철저했다면 이런 인권유린은 없었을 것이고, 검찰이 노재중 씨의 재산을 가압류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국가가 책임지고 배상하고, 노씨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라는 취지였다.

3년 가까이 끌던 이 소송의 1심 재판부는 국가의 관리소홀 탓에 불법구금과 폭행 등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한사람 당 25만원에서 5백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강제노역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양지마을에서 폭력으로 작업 동의서를 받아놓은 것을 근거로 강제적인 노역이라고 볼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원생들은 다시 항소를 하였지만, 아직도 재판은 진행 중에 있다.

소송을 맡은 이덕우 변호사는 "인권단체들이 힘들게 조사해서 폭로해놨더니 납치나 암매장, 성폭행 등에 대해서는 검찰이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법원도 양지마을 관계자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하면서도 청춘도 희망도 상실한 피해자들에게는 껌 값밖에 안 되는 배상금 지급 판
결을 내려 다시 우롱하고 있다"면서 이런 사법부의 태도 때문에 사회복지시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꼬집었다.


양지마을의 오늘

양지마을은 사건이 난 뒤 공주 마곡사에서 3년간 위탁 운영하다가 지난해 말 다시 천성원(양지마을 등의 시설을 운영하는 재단으로 노재중 씨는 이 재단의 이사장이었다)으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최근 '금이성 마을'로 이름이 바뀐 옛 양지마을을 다녀왔다는 유아무개 씨는 "그때 사람들이 다시 양지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앞에 내세우는 사람들만 바뀌었지 실세는 바뀌지 않았다"면서 옛 양지마을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노재중 씨가 이름만 바뀐 금이성 마을에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고 있다고도 말했다.


또 다른 양지마을, 에바다와 꽃동네

한편, 7년째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가 최근 정상화의 단계에 접어든 평택 에바다농아원의 경우에도 양지마을처럼 비리와 인권유린이 판치던 곳이었다. 우리 나라 대표적인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에서도 최근 오웅진 신부의 비리 문제가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문제가 되는 시설들은 모두 대형 수용시설이다.

이승헌 에바다복지회 사무국장은 "수용시설을 이용자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시설을 개방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과 함께 그룹 홈으로 개편하고, 나아가 시설의 선택권을 시설 이용자에게 주는 바우처 제도와 같은 것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설을 사유화해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려는 시설장들의 유혹을 차단할 수 있다"면서 정부 복지정책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사회복지시설의 인권유린과 비리의 구조는 지속될 것이고, 그 속에서 노예가 된 '인간'들의 신음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양지마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