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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연재] 59차 유엔인권위원회 소식 ②

한국정부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미국 눈치보기


이라크 특별회의 개최 무산

한국정부는 지난 27일 열린 59차 유엔인권위원회 본회의에서 '이라크전쟁의 결과로 인한 인권과 인도적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특별회의 소집에 반대했다. 주 제네바 유엔대표부 정의용 대사는 투표 전 발언을 통해 "한국은 이라크 국민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인도적 지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라크 문제를 다룰 적절한 기구이고 현재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인권위에서 특별 회의를 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라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이어 벌어진 투표에서 한국정부는 반대표를 던졌고 특별회의 요구 소집안은 찬성 18, 반대 25, 기권 7, 불참 3으로 부결되었다. 중국, 러시아를 비롯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일부 국가가 찬성표를 던진 반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는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프랑스와 독일 등 안보리 동의 없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영국에 비판적인 국가들도 이번에는 미국의 적극적 대변인 역할을 해 많은 인권단체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한 인권전문가는 "정부들이 말로는 인권을 외쳐도 실제 행동은 국가안보와 경제논리에 입각한 국익 중시의 이중잣대에 따라 행동한다"면서 "인권침해의 당사자인 국가가 인권에 대한 독점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사실 자체가 유엔 인권위의 모순이자 한계"라고 지적했다.


한국정부, 이라크 특별회의 소집 반대해

반대표를 던진 대다수 국가는 한국정부처럼 안보리 회의의 개최를 명분으로 내걸고 반대표를 던졌다. 또 "특별회의가 정치쟁점화 될 수 있다" 혹은 "개별 국가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의제항목 9에서 이라크 문제를 충분히 다룰 수 있다"는 이유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특별회의 소집을 적극 지지했던 대다수 비정부 인권단체들은 "인권위가 현재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인권침해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온갖 핑계를 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스스로 무능하고 비현실적임을 자인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또 99년 코소보 사태 당시 인권위가 특별회의를 개최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오히려 이번에 특별회의를 반대한 국가야말로 인권을 정치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회의 소집이 무사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여성단체연합 등 유엔 협의자격을 갖고 있는 23개 국제 민간단체들은 "유엔 인권위가 '미국과 영국의 불법적 침공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생명권을 포함한 제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선언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실망스럽다"고 지적했다.

한편, "안보리에서 인권문제를 다룰 것"이라는 한국정부의 주장과 달리 당일 뉴욕에서 열린 안보리에서 한국정부를 대표한 선준영 대사는 대규모 인권침해를 야기한 불법 침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해 국내외적으로 논란을 자아냈다. 게다가 "이라크 문제를 반전·평화·인권의 대원칙에서 접근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인권고등판무관, 미국 눈치보기 급급

일부 인권단체는 이번 사태와 관련, 국제인권법의 입장에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미국 눈치보기에 급급한 서지오 드 멜로(Sergio de Mello)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의 '정치적' 처신에 대한 실망감과 불만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23개 단체의 성명서는 "인권고등판무관이 표결 직후 한 연설에 따르면 인권침해가 벌어질 때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인권침해가 난 이후에야 인권문제를 다루자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서 "이는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고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강력 비판했다. 이들은 표결 전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인권고등판무관은 이라크 현지에 독립적인 인권조사단을 파견하라"고 주장했고, 국제엠네스티 역시 별도의 성명서에서 "유엔 안보리가 즉시 인권감시단을 이라크에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인권고등판무관실의 한 직원은 "매리 로빈슨 전 판무관이라면 강대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이라크 침공 자체가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분명히 선언했을 것"이라며 판무관실 내에서도 현 판무관의 애매모호한 입장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제네바 소재 국제인권봉사회(ISHR)의 아드레안 전 소장은 "메리 로빈슨 판무관의 퇴임과 서지오 드 멜로 판무관의 임명에 미국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면서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판무관은 지난달 스페인에서 로이터 통신과의 기자회견을 통해 "이라크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면 이라크의 인권 증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침공을 인정하는 발언을 해 일부 인권단체들의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지난 20일 침공 당일 발표한 호소문에서도 갈등 양측에 인권과 인도법의 준수를 촉구하고 인도적 지원의 중요성만 언급했을 뿐 침공자체의 반인권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아 인권단체로부터 "도대체 그가 인권판무관인지 난민판무관인지 모르겠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제네바-이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