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김혜진의 인권이야기

인간존엄 회복투쟁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



루쉰의 [아Q정전]에 보면, 아Q라는 인물은 동네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자신을 때리는 놈들을 '버릇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아비를 때리는 것이니 때리는 자들이 후레자식이 되고, 형편없이 두들겨 맞는 자신은 합리화된다. 이것을 '정신적 승리'라고 믿는 것이다.

아Q의 독특한 정신적 승리법을 알게 된 동네 청년들은 아Q에게 "난 벌레다. 난 벌레에 불과해서 맞아도 싸다"고 이야기하도록 만든다. 아Q는 스스로를 벌레이기에 맞아도 싸다고 말하면서도 '역시 자기를 비하하는 데 있어서는 내가 세계 최고일 것'이라면서 또다시 자신을 합리화하고 흡족해한다.

난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왜소한 개인이 이런 방식으로라도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는다면 그는 미쳐버릴 것이다. 이러한 합리화는 미약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방안일지도 모른다.


아Q식 '정신적 승리법'

한 대형유통업체 노동조합 간부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간부는 나에게 말했다. "비정규직들은 책임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일을 엉망으로 해서 야단을 치기라도 하면 다음날 안 나와버려요. 도대체 회사나 자기 일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노동조합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요?"

다른 간부가 또 이야기했다. "요즘 매장에 있는 젊은 비정규직들을 보면 참 답답한 생각이 들어요. 도대체 공동체적 의식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요. 함께 회식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고리타분한 걸 왜하냐고 하고, 친구들이나 애인과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더 즐기거든요."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번졌다. "비정규직들은 도대체 삶의 목표가 뭔지 모르겠어요. 게으르고, 되는 대로 살려고 하고, 그러니까 평생 비정규직 신세를 못 면하는 겁니다." 아마도 많은 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이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선

그런데 정작 비정규직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인터뷰를 했던 젊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도 "답답하게 일자리에 매어있을 필요 있나요. 현실을 즐기면 되지요."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것은 또 하나의 아Q식 '정신적 승리법' 아니었을까? 열심히 일해도 쥐꼬리만한 월급에 툭하면 짤리고, 정규직들에게 무시당하는 그들로서는 그렇게라도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으면 비참해서 살 수 없는 것 아닐까? 삶의 비전을 가질 수 없다는 것, 이것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되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것이라고 자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노하지 않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무력감'과 '길들여짐'이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력감'과 '길들여짐'은 투쟁의 의지 자체를 꺾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존중받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투쟁에 나선다. 그가 비록 현실의 벽에 부딪혀 당장 투쟁에 나서지 못하더라도 숨죽이며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나는 많은 비정규직을 만나면서 이들이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무기력한지 보게되었다. 울산에 있는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젊은 노동자였는데, 어쩌다보니 사내하청 중에서도 가장 노동조건이 안 좋은 3차 하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나이 드신 아주머니들이 손을 꼭 잡고 하시는 말씀이 "색시, 이곳에 있으면 인생 끝이야. 빨리 잘 알아봐서 2차 하청이나 1차 하청으로 들어갈 길을 찾아봐." 하신단다.

휴게실에서 당구를 치고 있던 하청노동자들은 직영이 오면 큐대를 내려놓고 비실비실 자리를 비켜준다.


'길들여지는' 비정규직

비정규직에 대한 멸시, 무리한 요구, 반말과 욕지거리들이 일상을 이루면서 비정규직들이 초기에는 '욱'하는 성미가 생기다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자신을 비하하여 주눅들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1류 노동자와 2류 노동자를 나누었던가. 정규직이 오면 큐대를 놓고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밑바닥 인생이고 그저 낮은 임금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길들여지지 않으면 매일매일 쏟아지는 차별 속에서 어떻게 정신이 나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비정규직 문제는 정말로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자신을 2류 인생으로 취급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구조이자, 그 비정규직에 대한 일상적 차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런 선택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극복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을 벌레로 취급해보기도 하고, 합리화해보기도 하지만, 심연에 놓여있는 인간다움을 향한 외침,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아Q가 사형을 당해 죽어가면서도 '내가 죽는 걸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다니 난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가'라고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했을 때 우리는 희극이 아니라 비극을 보게 된다. 그의 자위가 정말로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아마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심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현실을 극복하는 투쟁 과정에서 패배할지라도 그 길에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무리 숨죽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슴 속 깊이 있는 인간선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노동자들이 공돌이, 공순이라는 비하적인 호칭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우뚝 세워 당당한 '노동자'로 자기 선언을 해왔듯이.


"패배할지라도 그 길에 나서야 한다"

한진관광 면세점 동지들의 투쟁이 끝났다. 결과는 패배였다. 4.5개월의 임금이 그들 손에 주어진 전부였다. 그러나 그 동지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투쟁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내가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했어요. 사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내가 비정규직이라는 사실, 실은 자본에 의해 강제된 2류 인생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것이 정말로 힘든 일이었죠.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투쟁을 비정규직 투쟁으로 규정했고, 투쟁했습니다.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여태까지 3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투쟁하던 이 때 외에 한번이라도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 적이 있었나, 내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고, 투쟁을 이야기하고 삶의 비전을 말할 수 있었던 투쟁기간이 어떻게 보면 내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기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그래서 투쟁하는 비정규직 동지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승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투쟁에 나선 순간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두 눈 똑똑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으며, 바로 그 위에서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바로 자신의 힘으로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선언이다. 투쟁으로 나선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을 무기력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노동자로서의 존엄성을 세우며,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돌파하겠다는 결의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참했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 사람의 당당한 노동자로, 인간으로 일어서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동지들의 투쟁은 자신들만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묻혀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며, 이들을 짓밟는 데에 알게 모르게 일조해 왔던 정규직 노동자들을 '부끄럽게' 하여, '노동자'의 이름에 걸맞는 연대를 실현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