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연재] 국가인권위원회 들여다보기 : 비겁한 판단, 인권위 진정각하 결정

전향장기수 북송차별, 예비판사 임용차별…진정요건 미달로 구제 못 받아


9월 23일 열린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 아래 위원회) 전원위원회에선 두 가지 중요한 안건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8월 22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논의가 거듭된 △전향장기수 북송차별 △전력 및 나이를 이유로 한 예비판사 임용차별 건에 대한 결정이다. 결과는 모두 '각하'.

'전향장기수 북송차별' 건은 2000년 비전향장기수 북송에서 제외된 정순택(81)씨가 진정을 제기한 사건이다. 정 씨는 5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85년 대전교도소에서 전향서를 쓰고 89년 출소했다. 그러나 정 씨는 99년 4월 신문광고를 통해 공개적으로 전향의사 철회를 선언한다. "전향을 강요하며 계속되는 비인간적 처우와 폭력적 위협에 의해 불면증과 환청, 환시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러한 증세를 고치기 위해 전향이라는 굴욕의 절차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뒤 비전향장기수들이 대거 북송될 때, 정 씨는 '전향자'라는 이유로 북송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정 씨와 마찬가지로 99년 공개적으로 전향취소를 선언한 류연철 씨는 북송대상에 포함됐다. 류 씨는 출소 후 전향철회 의사를 밝힌 점에서는 같았지만, '교도소'가 아닌 '보안감호소'에서 전향서를 썼다. 이것이 정 씨와 다른 처우의 근거였다.

이 사건에 대해 논란을 거듭한 위원회는 "진정인이 주장하는 북한으로의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2000. 9. 2. 이루어진 사실이 인정된다"라며, 2001년 12월 11일 제기된 정 씨의 진정은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2조 1항 4호의 '진정원인으로부터 1년 이상 경과해 진정한 경우는 각하한다'는 규정에 해당한다며 진정을 각하했다. 형식적 요건의 미비를 내세운 '차가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위원회가 진정을 각하한 배경은 다른 데 있었다. 한 인권위원은 "권리구제의 실익이 있으려면 정순택 씨의 북송을 권고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실효를 가질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라고 밝혔다. 남북 간의 정치적 해결이 우선되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정책권고'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한편, 위원회는 '전향철회 선언'을 이유로 정순택 씨가 다시 보안관찰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제동을 걸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으로 복역한 뒤 출소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는 보안관찰은 '사상범' 출신자들에 대해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를 가하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행위다. 이 점에 대해 인권위원은 "정 씨의 진정취지가 북송과 관련한 차별문제였기 때문에, 보안관찰에 따른 인권침해 문제는 별도로 판단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위원회의 형식주의가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예비판사 임용차별' 건의 '각하'사유도 형식요건의 문제였다. 이 사건의 진정인 정아무개 씨(39)는 8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93년 복권된 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정 씨는 사법연수원 수료시 상위 5%에 해당할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으나 판사 임용에서 탈락했고, '그것이 나이와 전력을 이유로 한 차별이었다'며 대법원장을 상대로 진정을 내게 됐다.

앞서 정 씨는 헌법소원을 제출하기도 했으나, "일종의 행정처분인 예비판사임용거부는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므로 헌법소원의 대상으로는 부적법하다"라며 각하결정을 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 위원회는 "진정인이 위 진정취지와 같은 이유로 … 2001. 4. 13.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던 헌법소원은 2001. 12. 20. 각하된 사실이 인정된다"라며, "진정인의 이 사건진정은 진정 당시(2002.2.14) 법원 또는 헌법재판소의 권리구제절차가 이미 종결된 경우에 해당한다 할 것"이라고 각하했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2조 1항 5호에 규정되어 있다.

이 건에 대한 논의과정에서 "법원에서 이미 국보법 전력자를 임용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전력'에 의한 차별로 보기는 어렵지만, 명백히 '나이'에 따른 차별로 볼 수 있다"라는 의견이 제출되었다고 한다. 법원에서 39세 이상의 판사를 임용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포기한 것은 사법부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인권위원은 "사법부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에 문제를 제기하면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이다. 위원회는 진정1호 사건이었던 제천시장의 장애인임용차별 사건에 대해 이미 구제권고를 내린 사실이 있다. 두 사건간에 차이가 있다면, 인사권을 갖고 있는 자가 하나는 지방자치단체장이고 하나는 대법원장이라는 점뿐이다. 법조인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권위원들의 구성과도 무관치 않은 결정으로 비춰진다.

두 사건 모두 비공개로 논의가 진행된 결과 사회적으로 공론화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점에 대해 인권위원은 "인권단체들과 같이 고민해야만 좀 더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의제들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인권위원회 운영규칙상 비공개로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사안"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세 차례에 걸친 논의 후 형식논리를 앞세워 판단을 회피한 이번 결정은 위원회의 비겁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