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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윤태식과 장세동


14년 만에 진실이 드러난 '수지김 살해 및 간첩조작' 사건의 1심 재판이 끝났다. 재판부는 윤태식 피고인의 살인 혐의 등을 인정해 징역 18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인명을 살상한 행위를 법으로 심판하는 것이야 당연지사기에, 우리는 재판 결과에 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번 재판은 처음부터 '반쪽짜리' 재판에 불과했다. '살해행위'의 피의자는 법정에 세웠지만, '간첩조작 행위'의 피의자들은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윤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근거로써, 87년 당시 윤 씨가 사건의 전모를 안기부에 자백한 사실을 제시했다. 뒤집어 말해, 안기부가 살인범을 비호하고 사건을 은폐․조작한 죄를 인정한 셈이다. 이미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졌듯이, 장세동 안기부장은 단순살인사건이라는 보고를 받고도 진실을 가린 채 윤태식의 거짓 기자회견을 강행시켰다. 그 결과 망인에겐 천형이나 다름없는 '간첩'의 낙인이 새겨졌고, 유족들은 지옥같은 15년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유족들의 고통에 따르자면, 장세동의 죄는 살인범 윤태식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윤태식이 법정에서 고개를 떨구는 동안, 장세동과 그 일당은 태연히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공소시효제도가 갖는 아이러니가 이보다 극적일 수는 없다.

지난해 연말 수지김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을 때, 공소시효의 문제점은 바로 시정됐어야 했다.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고 은폐한 국가공권력에 대해서까지 예외 없이 공소시효의 혜택을 부여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상황은 제자리걸음이다.

재판부는 윤태식 피고인을 상대로 "범행은폐를 위해 북한공작원이라는 누명을 씌워 망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그 가족들까지 간첩의 가족이라는 질시를 받게 한 점, 거짓 기자회견을 해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물의를 일으킨 점 등은 중형을 선고받아 마땅하다"고 질타했다. 장세동이라고 예외일 까닭은 없다. '반인도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입법'이 지체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장세동을 만나게 된다. 공소시효의 장막 뒤에서 미소짓는 그들의 얼굴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