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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수지김 가족의 한맺힌 호소

"공소시효 없애는 운동 벌여야 합니다"


"죽으면 원귀가 돼서라도 이 나라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싶었습니다." 차분히 말을 이어가던 김옥경(45) 씨는 87년 1월을 떠올리게 되자, 격앙된 목소리로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지난 연말 검찰에 의해 87년 '수지김(김옥분) 피살 및 간첩조작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김 씨의 가족들은 비로소 세상을 향해 15년 세월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 아래 겪어야 했던 수모는 '빨갱이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김옥경 씨 가족의 고초는 언론을 통해 사건이 보도된 직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남편과 저를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안가(安家)로 연행했습니다. 하룻밤의 조사가 끝나고 새벽에 풀려난 뒤,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며 조사받은 내용에 대해 물었죠. 말없이 담배를 피우던 남편이 그러더군요. '더럽고 수치스러워서 아무 것도 말 할 수 없다'구요." 남편은 '죽을 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고 말할 뿐, 지금도 그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십수년의 시간이 흘렀고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입을 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남편의 흉중은 짐작으로만 헤아릴 뿐이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뿐만 아니라, 김옥경 씨의 남편은 다니던 직장마저도 스스로 그만뒀다고 한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김옥경 씨 부부는 가정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경우는 달랐다. 툭하면 '빨갱이 집안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냐'는 핀잔과 독설을 듣고 살던 동생은 결국 이혼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하나둘 이승을 떠나는 가족들이었다. 맏언니는 사건 발생 후 회사에서 쫓겨난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객사했고,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오빠마저도 술로 연명하다 사고로 숨지는 등, 김 씨 가족의 한은 그렇게 쌓여 왔다.

김옥분 씨의 무고함을 믿던 가족들은 사건 발생 초기에 언론사와 정부청사를 쫓아다니며 백방으로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싸늘하게 돌아오는 시선 속에서 체념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입 한번 열지 못했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다시 탄원서를 내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검찰 수사를 통해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남은 가족들은 비로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뻔뻔한 장세동에 분통 터트려

"누명을 벗은 것은 시원해요. 하지만 죄를 짓고도 뻔뻔한 장세동(당시 안기부장)의 모습을 TV에서 보고는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김옥경 씨는 언니를 살해한 사람보다도 살인사건을 은닉하고 언니를 간첩으로 둔갑시킨 안기부 책임자들에 대해 더욱 치를 떨었다. "솔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벌을 달라고 했다면, 우리는 오히려 용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 배 째보라'는 식의 당당한 모습이 너무도 역겨웠습니다."

김옥경 씨는 공소시효 때문에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힘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건가요? 국민들이 가만있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김 씨의 가족들은 장세동을 비롯한 당시 안기부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서명운동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범죄에 대해선 공소시효를 없애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수지김 가족들이 우리 사회를 향해 외치는 외마디 호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