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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인권은 투쟁없이 쟁취되지 않는다

-전태일 열사 30주기에 부쳐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에서 근로기준법을 화형하고 자신을 불태워 산화한 지 30년이다. 청계천 다락방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어린 여공들이 각혈하는 모습을 눈물로 지켜보았던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민중들을 깨어나게 했으며 새로운 운동의 지평을 열어갔다. '삼백만 근로자의 대표 전태일'은 죽었으나 전태일의 후예인 민중들의 투쟁에는 늘 그의 이름이 기려졌다.

'전태일' 그 뒤 30년. 노동자는 3백만 명에서 1천3백만 명으로 늘어났고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조직도 있으며 법령에는 노동자들의 권리목록이 있다. 30년 전에 비하면 상전벽해와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는 민중

그러나 오늘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현실은 깊은 '죽음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껏 투쟁으로 쟁취했던 명목상의 권리마저 한순간에 날아가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서 거리로 내몰리고, 이름뿐인 사회안전망에서도 외면당해 가정이 해체되고 추운 겨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더욱 제한하려는 3차 노동법 개악이 준비되고 있으며, 무한경쟁체계 속에서 기계처럼 혹사당하고도 쥐꼬리만한 임금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더욱 높아만 간다. 초국적 자본 앞에 백기를 든 정부는 그들의 무혈입성을 위해 대우자동차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비참한 노동현실의 한편에서는 군사독재자 박정희를 빈곤의 나락에서 탈출시킨 근대화의 아버지로 칭송하며 그의 기념관을 짓고자 국민의 혈세를 들어부으려 하고 있다. 그의 흉상을 철거한 이들은 영어의 몸이 되었고 정치권은 보수우익의 단결을 외치고 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는 고도경제성장의 신화는 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희생 위에 세워진 허구였으며, 결국 박정희 식 개발독재 모델은 이 나라의 경제를 재벌위주경제와 종속경제의 틀로 정착시켰다. 오늘날의 이 고통은 실은 박정희가 잉태한 천민자본주의에 그 근원이 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 박정희는 보수세력의 한결같은 염원을 안고 무덤에서 나와 찬란하게 부활하려 하고 있다.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한 예산은 악착같이 삭감하면서도 개발독재자의 기념관을 짓는 일에는 혈세를 쏟아 붓겠다는 작태가 '인권의 정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30년 전 전태일의 절규는 여전히 유효하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며 부익부빈익빈을 위해 무한경쟁에 내팽개쳐져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은 권리의 주체이며 당당한 인간이다. 또다시 퇴출과 실업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오늘,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하나로 단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몰려있다. 아셈을 저지시키지 못한 기회주의적인 투쟁은 노동자의 목을 치는 비정한 칼날이 되어 돌아왔음을 우리는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투쟁으로 인권을 찾을 때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자본가들의 방만한 경영이 빚어낸 부실을 노동자들에만 전가하려는 시도는 명백히 거부해야 한다.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항거했던 30년 전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노동자 민중의 통큰 단결과 연대를 실현할 때다. 노동자의 인권과 사회권을 실현하기 위해서 작은 몫을 나눠 갖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무권리의 상태로 내모는 상대를 향해 투쟁하는 것, 그것이 진정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 어느 한 순간도 인권은 투쟁 없이 저항 없이 쟁취되지 않는다는 역사의 진실을 기억해야만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