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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먼저간 아들을 대신해 싸운다

군의문사 유가족, 국방부 앞 삭발농성


국방부 청사 맞은 편의 용산 전쟁기념관 앞 인도.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소복을 입은 한 어머니의 절규와 교차하고 있다. 삭발한 어머니 열세 분과 아버지 두 분은 "내 아들을 살려내라"며 통곡하고, 급기야 한 어머니가 혼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7일로 닷새째 국방부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군의문사 유가족들의 모임인 전국군폭력희생자유가족협회(아래 전군협) 회원들. 이들이 지난해에 이어 다시 국방부 앞 농성을 시작한 까닭은 최근에 국방부의 사건조작 은폐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군 당국 사건조작' 드러나

지난 10월초 전군협 이혜숙(고 박현우 씨 어머니) 회장은 국회 홈페이지에서 98년 국정감사 당시 천용택 국방부장관의 발언이 담긴 회의록을 발견했다. 당시 국방장관은 "(박현우 상병의 경우) 구타에 의한 사망이 자살로 조작된 점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답변함으로써 군 당국의 사건조작 사실을 시인했던 것이다. 이혜숙 회장은 "사건이 조작됐다는 이의를 여러 차례 제기했지만 통하지 않았었다"며 "사건 조작사실이 확인됐다면 당연히 유가족 앞에 사과부터 해야 하는 일이 아니냐"고 분노를 토했다.

농성에 돌입하면서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요구사항은 세 가지. △군 당국이 자살 조작을 유가족과 언론에 은폐해 온 사실에 대해 유가족과 고인 앞에 진심으로 사죄할 것 △구체적인 재발방지 대책과 이와 관련한 처벌규정을 만들어 전군에 시달하고, 이를 각 언론사에 알릴 것 △모든 군의문사에 대한 정당한 후속조치를 통해 고인들의 한을 풀어줄 것이다. 이를 위해 유가족들은 매일 오전부터 저녁 6시까지 끼니도 거른 채 차가운 길바닥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특조단 해결사건 전혀 없어

17일은 민주화운동 관련 의문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의 현판식이 열린 날이었다.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민주화운동 의문사 사건'에 비하면, 일반 군의문사 사건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일반 군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작업도 '진행중'이기는 하다. '김훈 중위 사건'을 계기로 구성된 국방부 특별조사단이 지난해 4월부터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특조단에 의해 의혹이 해소된 사안은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혜숙 회장은 "특조단에서는 내 아들을 제외하곤 모두 자살이라고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내가 달려들지 않았다면 내 아들의 죽음 또한 영원히 '자살'로 은폐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개혁의 밑거름 되길 바랄 뿐"

98년 12월 7일, 아들을 잃은 동병상련으로 모인 유가족들은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오로지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일념 아래 버티고 투쟁해왔다. 99년 6월 5일엔 국방부 앞에서 열흘 간 단식농성을 전개한 끝에 조성태 국방장관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당시 조 국방장관은 "의문사 의혹의 철저한 규명과 군폭력 근절"을 약속했지만,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상황은 제자리일 뿐이다.

이혜숙 회장은 "군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처지는 사실 우리뿐이다. 욕심이 있다면, 먼 훗날 내 아들이 군 개혁의 밑거름으로 기억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