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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내가 본 인권선언 - 박성인(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사무처장)

1998년, '시장'논리에 압살된 '노동권'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이해 온 나라가 떠들석하다. 언론은 외국 인권단체가 발표한 한국의 인권지수를 앞다퉈 발표하고, 고문 등 국가권력에 의한 각종 인권침해 사례를 소개했다. 김대중 정권도 인권법 제정과 인권위원회 설치를 시도하고 있고, 대표적 반인권법인 국가보안법을 대신할 대체입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렇게 떠들석한 '인권'의 호황(?) 속에서, 은폐되고 있는 것이 있다. 가장 기본적 '인권' 문제인 노동권이 그것이다. 98년 한국사회에서 '일할 권리', '생존할 권리' 그리고 '단결해서 교섭하고 행동할 권리' 등 노동권만큼 압살되고 유린된 것은 없다. 그것도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미명하에, '총체적 개혁'의 이름으로 말이다. '구조조정'이라는 허울속에 수십만의 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고, 4백만명이 넘는 실업자들(민주노총, 98.8.통계)이 아무런 사회보장책도 없는 상태에서 길거리로 내몰렸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20%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에 의해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대량실업에 따른 고용불안은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생존만이 아니라, '아직 짤리지 않은' 노동자들의 '생존'과 '민주적 권리'도 심대하게 침해하고 있다. 98년 들어 80%가 넘는 사업장에서 임금동결과 임금삭감, 임금체불이 강요되었고, 작업장에서의 노동강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사무직, 제조업을 망라하여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단체협상 개악을 통한 노동조합의 무력화, 작업장 노동통제의 강화는 지난 10여년간 험난한 투쟁을 통해 쟁취해 온 현장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무너지고 있는 것은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만이 아니다. 정리해고의 칼바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 중, 5백여 명이 넘는 노동자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었고, 아남산업이나 만도기계 등에 대한 경찰력 투입처럼, 노동자의 '파업권'까지 유린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합의사항인 '전교조 합법화'와 '실업자 초기업단위노조 가입 허용'도 정부 내 견해 차이로 아직까지 법제화조차 되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1998년, 한국사회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인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가 이렇게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21세기의 진정한 인권개념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로 정의돼야 한다"(김대중 대통령,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대회 메세지」가운데)는 선언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고, '노동권'에 대한 확고한 보장에 바탕하지 않는 '인권'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