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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국민인권기구 설치 약속, 하루바삐 지켜져야 한다


지난 해의 개원국회에서 국민인권기구 설치 용의를 물은 한 국회의원의 질문에 대해 당시 법무부장관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국민에 대한 약속이었다. 몇 달 지나지 않은 작년 8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인종차별위원회 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다시 국민인권기구를 머지 않아 설치할 계획이며 이를 위해 법무부가 심층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이었다. 거듭된 국내외적 공약에도 불구하고 법무부가 실제로 국민인권기구를 설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아직까지 법안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이나 공청회를 개최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다. 혹시 내년이면 들어설 새 정권에 진상할 생각으로 일부러 시간을 끌며 금년을 그대로 넘길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응태세가 미흡한 것은 인권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시민운동지원기금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권단체협의회 차원에서 연구 하나가 간신히 진행되고 있을 뿐 더 이상의 준비는 없는 상태다.


정부, 거듭된 공약(空約)

거칠게 말해서 국민인권기구는 한 나라의 헌법이나 법령에 근거하여 인권 보호와 증진의 임무를 담당하는 독립된 전문행정기관으로 정의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낯설게 들리는 기구이지만 대충 인권분야에서 공정거래위원회나 노동위원회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로 이해하면 무방할 것이다. 이미 적지 않은 국가들에서 국민인권기구가 설치되어 운영중이다. 아시아만 해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등에서 국민인권기구를 두고 있으며 국가사회주의체제의 붕괴로 신헌법을 제정하고 새로운 법치구조를 모색중인 동구권 국가에서도 인기품목의 하나다. 가장 체계가 잡히고 모범적인 운영사례로는 호주인권위원회가 꼽힌다. 같은 국민인권기구라 할지라도 구성원리와 권한 내용의 차이로 말미암아 실제의 기능과 위상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인권 외교적 제스처의 하나로 급조된 측면이 큰 인도네시아 인권위원회의 경우 독립성과 조사권이 미흡해 인권상황의 개선에 기여할 여지가 작다고 지적된다. 분명한 것은 보다 많은 나라들이 국민인권기구를 설치하라는 유엔의 권고를 따르는 추세라는 점이다.


동남아, 동구에서도 필수

국민인권기구의 역할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 인권교육과 홍보. 예컨대 사법관리들이나 일반시민들에게 인권교육을 담당하거나 사회전반의 인권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세미나를 개최하고 홍보물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홍보활동을 전개하는 일이 그것이다. 둘째, 인권관련 입법과 정책 수립시 정부에 대한 조언과 지원. 예컨대, 기존의 인권관련 입법을 검토하고 개정안이나 신규법안의 기초를 지원한다든가 국제인권조약의 시행과 관련하여 정부에 조언을 하고 정기보고서의 작성에 기여하는 일이 그것이다. 셋째, 인권침해사실에 대한 조사와 구제. 인권피해자의 구제신청을 받아들여 진상을 조사하고 적절한 구제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기능은 국민인권기구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서 전문성과 신속성을 위해 법원의 전심으로 기능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법원과의 권한경합문제가 있어 제도 구상시 이를테면 누가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떤 절차로 구제신청을 할 수 있는지, 판단을 위한 조사절차는 어떻게 정할지, 권고권한만을 부여할 것인지 아니면 명령권한까지 부여할 것인지 등등의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게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신중하고 세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사항인 셈이다.


독립된 인권침해 구제기구

국민인권기구가 인권보장과 증진을 위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국민인권기구는 독립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충분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서 국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인권단체들의 참여를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강구해야 한다. 국민인권기구의 구성 및 운영에 인권단체들의 참여와 매개, 그리고 감시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될 때 국민인권기구는 유엔-국제인권기구-지역인권기구-국민인권기구-인권단체-시민 개개인으로 이어지는 촘촘하고도 단단한 인권보장의 그물망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위와 아래, 안과 밖을 잇는 가교 노릇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권의 효과적인 보호와 증진을 위해서는 멀리 떨어져있는 정부간 국제기구나 힘없는 비정부단체에만 기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국민인권기구를 설치하는 등 국내인권제도의 정비를 통해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접근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인권단체들은 정부에 대해 하루 속히 국민인권기구 설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다가올 입법공청회에 대비하여 국민인권기구의 구성과 운영 원칙에 관한 심도 있는 내부논의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곽노현(방송대 법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