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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단체탐방 31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한국지부

탈출을 시도하는 숨막히는 영화를 보면, 높은 감시 탑에서 빙빙 돌아가는 감시의 빛을 쉴 새 없이 쏜다. 그 빛 앞에서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이란 없고 ‘자유’는 불가능해 보인다. 방어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아찔’하게 비춰지는 빛! 그 빛과 대조적인 빛이 여기에 있다. 철조망에 둘린 조용하고 따스한 촛불 하나! 그것이 국제앰네스티의 상징이다. 앰네스티의 활동은 간단히 말해 대중적인 관심의 등불을 탄압의 피해자들에게 그리고 고통을 가하는 정부당국에게 비추는 것이다.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박한 실천이 모아졌을 때 그것은 권력자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주시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신들의 행동을 개선하도록 촉구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61년, 자유를 위해 건배한 죄목으로 7년을 선고받은 두 명의 포르투갈 학생이 있었다. 이들에 관한 보도를 본 영국인 변호사 피터 베넨슨 씨는 불의의 희생자들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은 항의편지로써 정부관계자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었다. “사면을 위한 탄원, 1961”이라 이름 붙인 이 캠페인은 정치적·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수감된 전세계 수인들의 석방을 위해 평화적이고 중립적인 탄원을 벌이도록 사람들에게 촉구하였다. 이 수감자들은 ‘양심수’로 불렸으며 이로써 이 새로운 어휘는 국제적인 명칭이 되었다. 이 캠페인은 많은 사람들의 동참을 불렀으며 이로써 단순한 폭로를 위한 노력으로 시작한 일이 영구적인 국제적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이 앰네스티의 시작이다. 오늘날 1백50개국의 백만이 넘는 회원, 지지자, 정기적 후원자들이 앰네스티 운동을 지원하며 이들 중 6천 개 이상의 지역그룹들이 전세계에 걸쳐 활동하고 있다. 해마다 이 운동은 수천에 이르는 인권침해 희생자들을 위하여 끊임없는 탄원을 보내고 있고 자료조사와 재판감시 혹은 정부당국자와의 접촉을 위해 다수의 대표단을 파견하여 공식적인 관계를 확립해 오고 있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앰네스티의 활동을 국내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여 지난 ‘아·태지역 앰네스티 회의’의 서울 개최 시 북한인권문제만을 떠들어대기도 했고, 똑같은 언론이 93년에는 ‘비전문가의 인권판정’이라는 칼럼을 통해 우리 나라의 인권상황을 비전문가 몇 명이 그렇게 평가해도 되느냐는 식으로 앰네스티 발표를 깎아 내린 예도 있다. 덕분에 앰네스티가 한국에서 유명해졌다고 웃어넘기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대구시내에 자리한 지부사무실의 문에서도 예의 그 따스한 촛불의 빛이 먼저 반겨주고, 세계곳곳에서 그 빛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양심수들의 얼굴포스터가 가득하다.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70년대 중반, 몇몇 재야인사와 나길모 신부(외국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국내적으로는 유신체제하에서 반국가 단체로 인식되어 탄압 받을 수밖에 없었고 밖으로는 자국문제에 개입할 수 없는 앰네스티 지침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런던국제사무국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80년에 주요간부가 구속되면서 서울과 광주를 중심으로 했던 모임이 다 깨질 수밖에 없었다. 82년 다시 재건을 시도했으나 탄압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소극적이고 친정부적인 활동으로 전락했으며 그 당시 민정당 간부나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 돈을 많이 내는 회원이 주름잡는 비민주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활동 그룹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지부사무실만 서울에 존재했다. 이에 허창수 신부(독일인)와 배영근 신부(벨기에인)를 중심으로 앰네스티 본래 정신과 민주적 운영을 회복하자는 노력이 시작되었고 국제사무국에 탄원서도 냈다. 이에 친정부 활동과 앰네스티 규약을 어긴 것으로 판명되어 85년 서울지부가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이때부터 지부는 없이 그룹활동이 시작되었다. 앰네스티 정신에 충실한 실질적 활동을 하면서 그룹도 늘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한국연락위원회, 조절위원회로의 발전, 92년 사무실 운영 재개, 93년 3월에 지부로 재승인 받게 되었다.

그룹이란 앰네스티 운동의 목적과 원칙을 지지하는 회원들이 일상적인 지역사회 속에 근거를 두고 참가할 수 있는 조직을 말한다. 그룹은 만들어진 순서대로 번호를 붙이며 폐쇄 되면 그 자리는 비워둔다. 현재 서울에 4그룹(직장인 중심), 17그룹(여대생중심), 21그룹(서울대학생모임) 등이 있으며 대구에 2,10,11,13,15,16,18,20그룹과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있고 대전에 12그룹(변호사모임), 예비그룹(주부모임), 마산. 창원에 14그룹, 전주에 19그룹 등 한 그룹에 평균 8-10명, 총 200여명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룹은 규모가 커지면 나눠지게 되어 그룹을 항상 새롭게 하고 ‘할일’이 항상 있게 된다.

현 지부(지부장 허창수 신부)의 조직은 총회와 집행위원회(그룹대표의 모임), 실무위원회와 사무국(사무국장 오완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무위원회는 캠페인(국가별, 주제별), 사형제도, 난민, 인권교육, 긴급구명, 소식지, 기금조성, 언론담당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한국지부는 세계적으로 볼 때는 아주 작은 지부이나 아·태권에서는 중간정도의 규모이다. 그러나, 한국지부만큼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지부는 없으며 그 속에서 일군 성과를 볼 때 앞으로의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앰네스티 활동규정 중 ‘자국관련활동’규정-앰네스티 회원은 회원자격으로서는 자국내의 인권문제에 관한 정보를 수집, 평가하거나 관련행동을 하지 않는다-에 대해 사람들이 ‘우리 문제도 심각한데······’라는 반문을 많이 한다. 그러나, 앰네스티의 이름으로 자국내의 인권침해 반대활동을 할 수는 없지만 전세계의 동료회원들이 그러한 인권침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러한 활동의 효율성을 배가시킨다는 것이 중요하며 ‘개인자격의 활동’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앰네스티 회원의 수는 명목상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 하나가 실제활동가라는 점에서 힘이 있다. 이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들이 편지를 쓰고 탄원을 하고 피켓을 드는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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