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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제45회 세계인권선언일 특집 1

인권선언일에 생각한 것들

P형께.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바뀐 후 '사정이다' '재산공개다'해서 연초부터 나라안이 떠들썩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분주함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쌀개방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예년에 볼 수 없던 조용한 연말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장서서 사람을 잡아넣던 권력자가 감옥에 들어가고, 평소에 부도덕한 정권을 성토하며 알고 지내던 인사가 갑자기 정부 공무원의 높은 자리에 임명된 기사를 보고 '아, 그랬던가'하며 가슴을 쓸던 일도 점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런저런 일로 사실 변화가 많은 한 해였었지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일상적으로 법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몇몇 소소한 변론을 하였을 뿐입니다. 21세기니, 신세대라는 말도 있는데, 시대에 점점 뒤떨어져 가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 숨김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세월에 뚜렷한 삶의 지침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단 저 하나만이 아니겠지요.

그러자니 마음의 위안이라고나 할까, 예전에 P형이 제게 해준 말이 생각이 나는군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주위에 있는 타인들과의 관계, 그 공통된 삶의 수준을 그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그러셨던가요?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똑같이 물에서 헤엄을 치는 경우에도, 익사직전의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뛰어드는 행위는 '가치 있는 있는 일'이겠지만, 건강을 위한 수영은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그친다고 덧붙이신 말씀이 뇌리를 스칩니다. 그러면서 작게는 가족, 친구관계에서 시작하여 넓게는 사회, 인류까지 열거하셨지요. 또 형은 인간이 각자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지요. 사람은 이러한 연대의 확인작업을 통해 비로소 삶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의미였습니다. 태아가 어미의 뱃속에서 합일의 극치상태에 있듯이, 오래 전에 모태에서 떨어져 나온 P형과 저와 같은 성인은 연대적 삶의 영역을 확대해감으로써 불안감과 갈등을 줄이고 태아적 삶의 행복을 편린이나마 맛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은 이러한 연대적인 삶의 방식의 하나로 인권운동의 예를 들었습니다. 형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보다 나은 쪽으로 유도하는, 즉 가치 있는 삶으로의 전환이 인권운동의 목표라고 강조하셨고, 저는 현학적으로 들리면서도 형의 정의에 동의한 것으로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저희같은 법률가에게는 인권이란 국가의 강제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살 권리,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 등 법전 속의 권리로 표상되기 마련입니다만, 형은 인권운동이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의 운동이라고 보셨지요. 말하자면, 인권이란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동태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지구상에 낙원은 아직은 요원한 것이므로 인권향상의 문제는 영원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국내든 국외에서든 인권문제는 항상 누군가의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인권에 관한 문제는 그 샘이 마르는 일은 없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인권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마치 시지프스처럼 영원히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돌을 올려야만 할 운명을 타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소모되겠지요. 하지만 그에게 연대에서 오는 평화가 선물로서 주어집니다.

얼마 전에 조계종에 종정 성철스님이 입적하셔서 온 나라안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성철스님이 설법한 진리의 말씀보다는 '외국어에 능통하였다' '사리가 몇개 나왔다'는 등 외형적인 관심이 쏠려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불가에서는 성철스님이 특히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 가르침을 '돈오돈수'라고 하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지요. 저는 그때 '돈오돈수'에서 말하는 '깨침'을 앞서의 '가치의 발견'으로, '돈오점수'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가치의 실천과정인 인권으로 대응해 볼 수 있지 않나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권운동은 연대적 삶에서 오는 인간적 기쁨의 가치를 깨달아 각자의 삶의 지평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 생활과 사회활동에서 가치를 실천, 실현해 나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12월 10일. 45번째 맞이하는 인권기념일입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주변상황 속에서 무지한 자신의 일상을 돌아다보니 불현듯 P형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리워져 사설이 길어졌습니다. 평소 부족한 저를 늘 채찍질하며 이끌어주신데 새삼 감사 드리며 얼마 남지 않은 연말 더욱 보람있는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


이석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