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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진 출처 : 넷플릭스코리아 X)

 

미옥은 열 명 남짓 일하는 마스크 공장 노동자다. 그의 남편 호석은 수천 명이 일하는 SP중공업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노동자다. 직원 40%가 정리해고 당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경험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다. 해고노동자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은 예지는 호석을 카메라 앞에 세우려고 공을 들인다. 구조조정을 촉발한 글로벌 사모펀드의 펀드매니저로 암시되는 상우는 아내 예지의 도전을 응원하면서도 냉소한다. 당신이 메소드 연기를 잘해서 좋다고. 예지가 말한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

 

영화가 건넨 질문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개에 극장을 찾았다. 넷플릭스 회원이 아니거니와 ‘가능한 사랑’이라는 제목이 궁금했다. 영화에서 ‘사랑’을 직접 말하는 대사는 예지의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대체로 이렇게 이어진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시혜 또는 이용 사이에 경계가 있는가,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인가, 자기에 대한 사랑인가.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은 가능한가… 아마도 이창동 감독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므로 가장 간절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게 남은 질문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 내게는 미옥이 그 질문을 펼쳐 보이고 실마리를 주는 사람이었다. 사랑은 역량이다. 살피고 헤아리면서도 보이는 것 너머로 이끌리는 마음에 충실할 줄 알고, 스스로를 내맡기면서도 그 관계와 조건을 빚어가기 위한 노동의 지루함을 견딜 줄 아는, 그리고 단절과 이별이 필요한 때를 알아차리는 역량. 미옥은 참 잘,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미옥이 호석을 만난 날, 호석은 과수원에서 사과를 하나 따서 윤이 나도록 닦아서 미옥에게 슬쩍 건넨다. 사과를 건네받고 난 미옥의 표정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을 너무나 잘 담았다. 배우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조금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다음 장면이다. 카메라는 두 사람 사이를 비추지 않고 열린 길, 그 너머 펼쳐진 하늘을 비춘다. 미옥에게 사랑은 자유다. 내 삶을 내가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감각.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감각.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흔히 ‘소극적 자유’로 규정되는, 타인의 간섭이나 방해가 없는 조건을 떠올린다면 사랑은 자유일 수 없다.

 

실패하는 사랑

미옥은 호석의 삶을 함께 겪는다. 오늘 무엇을 입을지, 오늘 무엇을 먹을지가 중요한데 호석은 알아주지 않는다. 집 밖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로 약속한 호석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동료들이 집단상담을 받는 자리에 나가길 바라는데 가지 않는다.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미옥은 파업 이후 이전 같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 호석이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호석이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지와 미옥은 서로가 필요했고 서로를 이용했다. 둘의 목적은 달랐지만 호석이 카메라 앞에 앉는 시간만큼은 함께 만들어야 했다.

결국 호석은 카메라 앞에 앉았고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봉인에서 풀려나오기 시작한 이야기는 호석을 집어삼킬 듯 몰아쳤다. 아직 이야기가 되지 못한 감정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으로 터져 나온다. 고통스럽지만 호석이 자신을 대면하기 시작한 이상 치유는 시작되었다. 미옥과 예지는 이제 서로의 과업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예지는 남은 고통과 이어지는 시간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과업이다. 미옥에게 이제 카메라는 필수가 아니다. 호석이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역량을 함께 만드는 건 소주 한 잔 같이 마시는 일로 시작될 수도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 예지는 사랑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다른 계급이거나 ‘카메라’를 든 감독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는, 잘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감독들을 알고 있다. 계급이나 정체성이 같다는 말로 그들의 역량을 지울 수 없다. 주체와 대상이라는 근원적 구도를 넘어설 뾰족한 수도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삶을 또 다른 매체로 옮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상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는 것이 역량인지도 모른다. 주체는 대상에 우위를 갖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대상에 불가피하게 종속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예지는 자신이 호석과 미옥에게 종속된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미옥 부부가 자신을 떠나는 순간 예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사랑, 그리고 노동

이창동 감독은 <가능한 사랑>을 ‘노동에 관한 영화’이고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아니었을 듯하지만, 영화는 두 가지가 같은 것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정리해고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지만 ‘노동’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도 담고 있다. 대자산가인 상우가 “카타르라는 큰 도시는 노동자들이 만들지만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다”며 세상의 부조리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장면도 그렇다. 관객들은 상우의 별장을 관리하는 사람과 음식을 차려주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상우의 허식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일 수도 있지만 앎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음’을 알지는 못한다. 사모펀드가 벌인 일로 고통받는 노동자의 아내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투자가 성공했음을 환호하는 것처럼.

호석이 카메라 앞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쏟아내는 경험은 경찰특공대에 진압당하던 공장 지붕 위에서의 경험이다. 구타의 기억보다, 구타당하는 자신과 눈을 마주친 동료가 망설이다가 등을 돌렸던 기억이다. 그는 노동조합이 싫다고 했다. “연대니 투쟁이니 노동자 권리니” 하는 말로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품었던 희망은 헛된 것일 수 없었다. 미옥의 말로, 집단상담에 참여한 노동자의 말로, 영화는 두 번이나 강조한다. “우리가 이긴다 믿었어요. 이게 정의니까.” “이건 사회가 진 거예요.” 희망을 품게 만든 것은 노동조합이고 희망을 헛되게 만든 것은 사회였다.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패배해버린 사회에서 다시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구타당하는 동료를 두고 도망치는 노동자의 배신은 누구의 책임일까. 만약 정리해고와 공권력의 진압 작전이 주어진 조건이라면, 우리는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동료를 버릴 수밖에 한 선택을 누가 들여온 것인지 질문한다면,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선택을 함께 할 수 있다. 관계가 형성되는 조건을 바꾸는 일. 나는 그것이 노동이자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예지와 상우의 실패는 관계가 언제나 의존적일 수밖에 없음을 잊은 권력의 실패이기도 하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의 실패는 ‘탐함’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탐하거나 취하려는 ‘남의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기반임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더 잘 사랑하려면

감독의 의도를 벗어났을 법한 영화 읽기는 여기까지. 영화는 사랑에 대해 질문하지만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국가폭력 장면의 재현이 꼭 필요했는지 의문이 남기도 했다. 조금 못된 영화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옥이 보여준 사랑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의존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만큼 더욱 자유로울 수 있고 더욱 사랑할 수 있다. 더욱 큰 세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며 관계의 조건을 더욱 크게 바꿀 방법을 익혀가는 일. 그것이 사회운동이기도 하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함께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곁에 있는 것이 시작이다. 보름달이 뜨지 않더라도.